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관광명소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
과거 분단시절 동독주민의 서베를린으로의 월경을 차단하기 위해 세워졌던 베를린 장벽(총 길이 155 km)의 한 부분으로, 베를린을 관통하는 슈프레 강의 동쪽 강변에 자리해 그 이름을 얻은 벽화가 그려진 1.3킬로미터의 철근 콘크리트 장벽을 뜻한다.
▶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 독일의 분단과 베를린 장벽
2차 대전 말기 소련군이 점령한 베를린은 종전 후 미·영·불·소의 연합군이 분할 통치하였다. 패전 당시까지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동베를린과 나치독일의 동부지역은 소련군의 관할로 통치되다가 후에 독일민주주의인민공화국(동독)이 세워졌고, 후에 서베를린으로 통합된 미국·영국·프랑스의 관할지역은 나치독일의 서부지역에 세워진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귀속되어 동독 영토 속의 작은 섬이 되었다.
승전국의 분할점령 통치기간 동안과 동·서독의 분단 초기에 독일 주민들은 간단한 통과의례를 거치면 다른 지역으로 자유로이 왕래를 할 수 있었으나, 냉전이 심화되고 동독 주민의 서독, 특히 서베를린으로의 탈출이 빈번해지자 동독정부는 1961년 8월 12~13일 동·서 베를린의 경계에 철조망을 설치하는 것으로 교류를 급격히 제한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철조망에서 시작한 베를린장벽은 시간이 흐를수록 견고한 콘크리트 장벽과 지뢰밭, 감시초소들로 견고해 졌고, 1989년 11월 6일 베를린 장벽이 상징적으로 붕괴될 때까지 수백 여 명(추정치)에 달하는 동독주민들이 탈출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비극의 현장이 되었던 것이다.
| 그라피티와 벽화프로젝트 -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동·서 베를린의 경계에 설치된 베를린 장벽의 서베를린 쪽 벽면은 서베를린 주민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접근할 수 있어 수 십 년간 그라피티의 천국이라 할 만한 거대한 그림판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라 불리우는 이 구간의 장벽은 예외적으로 공식적인 동·서 베를린의 경계인 슈프레 강의 수면이 아니라 장애물 설치의 어려움을 감안한 현실적인 이유로 동베를린 쪽의 강변에 세워졌고 그 벽면은 무장한 군인들의 엄격한 감시 속에 잘 보존(?)되었던 것이다.
1990년 봄, 동독과 서독정부가 통일과정을 논의(공식 통일 : 1990.10.03.)하고 있던 시점. 서베를린의 예술대학 HDK(현재의 UDK)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카니 알라비가 발기한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의 동쪽 면에 통일의 감격을 재현하는 '벽화 프로젝트'에 21개국 118명의 젊은 예술가들이 참가하였다.
미술관련 독일 대학생들과 외국인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었고 당국의 재료비 지원을 받아 '독일 통일의 감격'과 '희망'을 높이 3.6미터 길이 1,31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 위에 펼쳐낸 것이다. 이 정도면 세계에서 가장 긴 공공미술 프로젝트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좌로부터 <Test the Best>, <주여! 이 치명적인 애정에서 살아남도록 도와주소서>, <무제>
동독의 국민차이자 동독 기계화의 상징이었고, 작은 마력에 일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차체로 유명한 소형차 '트라반트'가 육중한 철근콘크리트 장벽을 뚫고 나오는 유쾌한 상상력을 발휘한 브리기트 킨더의 그림 <Test the Best>나 동구권에서 '형제의 입맞춤'으로 유명한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동독의 당 서기장 호네커의 '진한' 키스를 재현한 Dmitry Vrubel의 작품 <주여! 이 치명적인 애정에서 살아남도록 도와주소서>, 당시 HDK에서 시각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다가, 알라비의 권유로 이 작업에 참여했던 김영란 씨의 작품 <무제> 등 106점의 크고 작은 벽화를 볼 수 있다.
이제 세계에서 몇 안 남은 분단국가의 하나인 한국. 한국에서 열렸던 비무장지대 관련 문화행사 '베를린에서 DMZ까지' 등에서 보듯, 우리의 시각에서는 분단의 상징을 통일의 감격과 희망을 표출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독일의 정황이 부럽고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김영란(사진) 씨에 따르면 수 년 전에 알라비 등 벽화프로젝트 참여 작가 3명과 한국에서 한국작가들과 공동전을 가진 적이 있었고, 베를린 프로젝트의 작가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유사한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재현·전시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고도 한다.
|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의 문제와 보존
1991년 벽화가 그려진 이스트사이드 갤러리가 보호문화재로 등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벽이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노천에 방치되고 있고, 소재지 자체가 인적이 드문 곳인 데다가 벽화를 그라피티(낙서)로 대하는 많은 여행자들의 인식 그리고 이를 조장하는 관광업체들로 인해 벽화들이 많이 훼손되었다.
이에 벽화프로젝트의 주도자들이 1997년에 사단법인으로 설립한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예술가협회를 중심으로 그 보존을 강구하고 있다.
그 결실로 2000년 300미터 구간의 벽화가 복원되었는데 지역의 수습 도장공들이 초벌작업을 맡았고 독일도료산업협회가 그 자재와 기술자문을 지원했다.
통일의 감격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통일된 독일 내부에서도 커져만 가는 빈부의 격차, 그에 따르는 구 동독출신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반영하듯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현지 주민들에게는 식상한 거리의 흉물로 인식되어 가는 듯하다. 이 지역의 재개발 과정에서 민간자본을 유치해 세운 체육관으로의 접근을 위해 45미터의 장벽을 들어낸 것도 과거의 기억 보다는 현재의 편의와 미관이 우선함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겠다.
2008년의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늘어만 가는 낙서 외에도, 장벽 내부의 철근이 부식해 들어가고 콘크리트 부분이 떨어져나가는 등 근본적인 보수가 시급한 형편이다.
해당 지자체인 크로이츠베르크-프리드리히스하인 구청과 문화재청은 2,170,000유로(33억 원)에 달하는 복권의 문화기금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는데, 독일의 병폐 중 하나로 손꼽히는 관료주의의 복잡한 절차로 아직까지 이를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도 있다.
아무튼 내년까지 장벽과 벽화의 복원과 주변정비 작업이 끝나면 번듯한 기념관을 통해 점점 잊혀져가는 '분단의 비극'과 '통일의 감격'을 생생하게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
........................................................................................................................................... 4년전 혼자 독일로 여행을 떠났던 그 때 갔던 베를린 장벽에서 난 저 그림들을 보지 못했다. 또는 인식하지 못했거나. 역 앞에서 시작하는 walking tour에 동참하여 가이드를 따라 이 곳 저 곳을 다닌 덕분일까? 스쳐 지났을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공간들을 알게 되었던 건 좋았지만 2시간 동안 동분서주하며 다닌 덕분에 정작 한 곳 한 곳의 의미를 되짚어 볼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는 못했던것 같다.
언젠가 다시 독일 여행을 가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 땐 좀 더 세세히 훑고 다니리라!
그나저나 티스토리가 제공하는 틀이 있어 스크랩이 잘리네 -_- 관심있는 사람은 링크 타고 가서 보시길. 이건 내 소장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