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life

인생이 무료할 땐 이런 책 한 권 정도 어떨까?

nobadinosemi. 2009. 6. 2. 08:16




아마도 약 열흘에 걸쳐서 소설책을 읽어 보는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것도 여러 권이 아닌 단 한 권의 소설을. 보통의 썩 괜찮은 소설책이 가지는 특성은 한 번 손에 잡으면 뒷 내용이 궁금해져서 도무지 중간에 그만둘 수가 없게 되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소설책은 그러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하나가 마치 단편처럼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의 줄기를 놓치지 않고 이어지기에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열흘이 걸렸을 지언정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된 듯 하다.

처음에 손에 잡고 읽기 시작한 이유는 평범하지 않은 제목과 꽤나 귀여운(적고 싶은 말이 많아 적당한 단어를 찾는데 시간을 보내기엔 조급함이 발동하여 조금 힘드니 그냥 귀엽다고 하자.) 표지 때문이었다. 그리고 에피소드들을 하나 둘 읽어 가다 보니 이 책을 손에 잡기 전 볼모가 이야기 해줬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봤다는 심토머들, 예를 들어 몸이 점점 나무화되어 가는 사람과 그 사람이 사는 마을에는 그러한 신기한 현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뭐 그러한 이야기들을 들은 터라 혹시 볼모가 이 책을 읽고 착각한 건 아닐까 하는 조금은 비웃어 주고 싶은 아주 나쁜 마음에서 계속해서 읽기 시작했더랬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녀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로서는 정말 사이좋게 보듬어 안아주고 싶은 사람이 아님에는 틀림없나 보다.

아무튼 그러한 불순한 의도에서 읽기 시작한 이 책은 달콤한 꿈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차가운 화이트 와인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 한 두 개의 에피소드를 읽고 나면 금새 졸음이 몰려왔으니까. 그렇게 열흘 동안 지리하게 책 반 권을 겨우 넘길 즈음 오늘은 컴퓨터 화면 들여다 보는 것에 싫증이 난 나머지 일찌감치 퇴근을 하고 이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손에 책을 들었더랬다. 조금씩 속도가 붙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다지 뒷 내용이 궁금하다거나 해서는 아니었는데 삼분의 이 가량을 읽었을 즈음일까? 주요 인물의 생명이 점점 꺼져가면서 그래서 어떻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호기심이 점점 발동하기 시작하더라. 

물론 그러한 호기심 외에도 이 책이 나를 끌어당긴 매력은 또 있었다. 시니컬한척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만한 에피소드들을 풀어내는데 그러한 이야기 주인공들이 안드로메다에 사는 외계인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이라는 점과 가끔 스치듯 머리 속을 지나가는 한 번쯤 고민해 볼 법한 인생의 주제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가볍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사항들이니 제법 관대한 척 '그럴수도 있지 뭐'하던 것들이 막상 나와 엮여 버리면 과연 나는 지금처럼 이렇게 시니컬한 모습으로 관용이라는 가면을 쓴 채 일관된 모습을 하고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고민들 말이다.

그렇게 무심한 듯 고민의 씨앗들을 툭툭 건드리면서도 결코 무거움의 나락으로 끌어당기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점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면 노트에 생각들을 나열해 가면서 또 상상도 해 가면서 그렇게 마지막 장을 읽고 난 후의 기분은 '아쉽다'였다. 마지막 장 즈음에 이르면서 안간힘을 써서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기색이 읽히고 불편한 전개가 이어졌기에 속도는 붙었으나 열심히 달리기는 하는데 무언가 '그런데 왜 내가 이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헉헉대며 질주를 하고 있는 거지?' 하는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의문에 사로잡히는 것 같은 그런 달갑지 않은 기분이 드는 거다. 

뭐, 그래도 여튼 나는 끝까지 읽었고 이 정도의 책이라면 돈을 주고 사서 보았다 한들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후회하지는 않겠다 싶다. 운이 좋아서(?)인지 책장에 꽂혀 있던 놈을 공짜로 읽게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무언가 신선하면서도 가볍고 그러면서도 촐싹거리는 느낌은 들지 않는 책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인생을 너무 무겁게만 바라보며 온갖 인생의 불행은 혼자 다 끌어안고 사는 사람에게 권해 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다지 세심하지 못 한 성격에 소설을 다 읽고 뒷 편에 실린 심사평을 보면서야 '아, 이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뻔히 책 표지에 제일 위쪽에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라고 써 있는데 전혀 몰랐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의 평가가 독자들의 눈길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며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 중에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어 옮겨 본다.
- 전경린 
"사실 많은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견딤을 통해 무화되죠. 그런데 유머로 문제를 견뎌나가는 힘은 어디서 기인하나요?"
- 작가 
"그것은 육체의 건강성과 정직함 같아요. 제가 만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지지리 가난하고 힘들거든요. 빚도 많고, 일도 잘 안 풀리고, 앞도 안 보이고, 사는 건 팍팍하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술자리는 언제나 웃기고 즐거워요. 보통 허리가 끊어질 듯 웃다가 돌아오는데 막상 뒤돌아 서서 사는 꼴이 어떤지 살펴보면 분위기가 거의 임진왜란이에요. 항상 답답하고 엉망이죠. 그런데도 엄살떨지 않아요. 그런 거대한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는 자기가 아프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전염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어떤 건강성과 삶의 정직함이 있어요. 옛날부터 나는 엄살을 잘 떨었기 때문에 그런 내공 있는 사람들을 되게 좋아해요. 막상 들어보면 심각한데 '인생, 뭐 별거 있냐? 그냥 가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그 술자리가 넘어가고, 또 한 시절이 넘어가고. 시간이 지나서 보면 나아진 것도 아무것도 없고 분위기는 여전히 임진왜란인데 술자리에서 보면 그렇게 웃어대고 즐겁고 그렇거든요. 그게 저는 우리네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건강성과 정직함이 아닐까 싶어요. 뭘 해결하는 게 아니라 웃음으로 삶을 견디는 거죠. 거기다가 해탈이니 구원이니 하는 선적인 요소는 결코 넣고 싶지 않아요. 아, 가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하나?"

(중략)

- 전경린 
"조울증, 내성적, 칩거형. 그런 몇 가지 정보를 들었을 때 인터뷰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만나보니 ㅅ아상과는 많이 다른걸요."
- 작가
"사람이 자기를 보호하는 방식이 두 가지잖아요. 하나는 거대한 청동 갑옷을 입고 고슴도치처럼 웅크려서 '나는 이렇게 생겼으니까 때릴테면 때려봐라' 하는 우직한 스타일이고, 다른 하나는 가면을 만들어서 진짜 자신은 숨겨놓고 사람들이 가면을 때리게 만드는 스타일인데, 저는 후자죠. 대외 모드와 골방 모드가 아주 달라요. 다르기 때문에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가 생기는 거죠. 제 별명이 '무늬만 사교적'이에요. 밖에 나오면 마치 외향적인 사람인 것처럼 막 떠들고 까불어요. 그런데 오늘처럼 이렇게 많은 말을 쏟으면 집에 들어가서 앓아누워요. 아! 내가 왜 그딴 말들을 떠들어댔나 혼자 자책하면서요. 일단 도시에 들어오면 밖에 잘 안 나오고 낯선 사람들도 잘 안 만나죠. 뭐, 성격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책 뒷편에 실린 류보선 씨의 심사평 중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조금만 발췌해 보자.
[예컨대 한 토포러는 IMF 시절 망해가는 회사를 건지기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불면증에 빠져들고 더이상 희망이 없어 죽을 결심을 하다가 말 그대로 겨울잠 같은 긴 잠을 잔 후 토포러가 된다. 그리고 그 이후 그 인물은 토포러의 예찬론자가 된다. 먹고산다는 이름하에 얼마나 현대인들이 비본질적이고 비본래적인 것에 목을 매며 살고 있는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캐비닛>의 인물들은 모두가 이런 식이다. 이렇게 <캐비닛>은, 수많은 돌연변이들을 통해서 무조건 현실원리에 충실할 경우 우리는 어느 순간 괴물 같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한편, 그 비정상적인 것들 속에서 보다 진정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질서화되지 않은 혁명적 에너지'를 찾아낸다. 오늘날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천착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관이라 해야 하리라.]



별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난 후 감상평을 길게 쓰는 편이 아닌데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서일까? 다 읽고 난 후 퇴근했던 사무실로 다시 돌아와(노트북이 고장나서 더 이상 방에서 컴퓨터를 하는 것이 불가능 하기에) 컴퓨터 전원을 켜고 이렇게 누군가는 자세히 읽을 지도 모르는 감상문을 끄적거린다. 글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귀차니즘을 이겨버린 덕이다.



아, 가장 중요한 사실을 기록하자면 이미 눈치를 챘을 테지만 책 제목은 <캐비닛>이며 작가 이름은 '김언수' 제 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