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dailylife / 2007. 3. 18. 01:43

한동안 침체(?)되었던 문화생활 가운데 18일 막을 내린다는 말에 충동적으로 보기로 결정! 다음달 카드값 따위 무시하고 긁어버렸다. 결론은? 백만번 잘한 결정이라는 것!(비록 카드 결제일날 눈물을 흘릴지언정~;)
대개 공연들이 공연장 불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무대에 조명이 켜지며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사람들이 착석하는 동안 배우들이 무대에 등장해 있었고, 불이 아주 약간 어두워진 가운데 그대로 막이 시작되었다. Bertolt Brecht의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를 이윤택이 번안 & 연출한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이제까지 보아 온 많지 않은 공연들 가운데 단연 으뜸 세 손가락 안에 꼽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연극이라는 것. 배우들의 연기(특히 억척어멈의 억눌리고 한이 담긴 울음은 심장을 저릿하게 쥐어짜더라)와 음악은 물론이고, 소품이나 배우들의 무대 위에서의 자리 배치와 조명까지 참 많이 마음에 드는 연극이었다. 순간순간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충동을 꾸욱 눌러야 할만큼.
서두는 이 정도로 해 두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나는 브레히트의 원작을 접해 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 비교 분석 같은 건 불가능하고, 첫번째 좋았던 점은 mutter courage를 '억척어멈'이라는 단어로 번역한 점을 꼽고 싶다. 이보다 더 어울리는 단어 치환은 절대 없을 것이라 단언하고 싶을 정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기 전공은 못 버린다고 연극을 보는 동안 억척어멈을 영어로 어떻게 바꾸면 좋을까? 내내 생각을 했었는데 딱 맞을만한 단어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프로그램북에서 mother courage and her children 이라는 번역을 보고 참 실망했다. 영어권 사람들이 실제로 courage라는 단어에서 억척스럽다는 느낌을 도출해 내는지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갖고 있는 courage라는 단어의 느낌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없기에 그런 걸게다.
두번째 좋았던 점은 연극을 보는 동안 떠오른 많은 생각 또는 이미지들이 연극을 보는데 방해가 되기 보다 오히려 더 극적인 감정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대게 공연을 보는 시간동안 집중력 부족인 나는 중간중간 끝없는 연상작용에 의해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연극이 얼마나 관객을 긴장된 상태로 잘 이끌어나갔는지를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의 인물들인 염상구나 하대치가 극중 인물들에 투영된 모습으로 내게 비춰지기도 하고, 엄마가 가끔 들려주던 6.25 당시 피난가던 이야기들 - 예를 들면, 산사에서 잠을 자는 동안 여우가 어린 애들을 물어간 이야기나, 여전히 어리고 작았던 엄마가 외삼촌과 외할아버지 양 손에 매달려 물 속에서 둥둥 뜬 채로 낙동강을 건넜던 이야기, 그런 낙동강이 핏물로 시뻘겋게 변한 채 흘러흘러 가던 이야기 그리고 추운 겨울 먹을 것이 없어 소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었다던 이야기 등 - 이 떠오르기도 하고, 미군이 원조한 밀가루 덕에 삼시 세끼를 밀가루 수제비로 때웠던 어릴 때 기억으로 지금도 밀가루 수제비를 참 싫어하는 아빠도 생각났다. 이러한 많은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내용 중 그 무엇 하나 놓치지 않았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지 않아?
세번째 좋았던 점은 난방을 심하게 한 것도 아니고, 옷을 두텁게 입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온 몸에 열기가 돌아 마치 과천에서 도곡동까지 쉬지 않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많지도 적지도 않은 공연들 중 참 많이 마음에 들었던 공연들도 있었지만 이런 기분을 느껴보기는 처음인지라 낯설기도 하고, 무척 만족스럽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공연장을 빠져나온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빨라진 맥박이 제자리를 찾았으니 뭐 말 다한거지.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기독교 관련한 내용들. 내가 시대 상황을 잘 몰라서인지, 아니면 기독교적인 면에 있어 원작(1618~48년에 있었던 30년 전쟁-종교전쟁-이 배경)에 충실한 번안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6.25 당시 기독교적인 요소가 그리 영향을 많이 미쳤을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이 연극에서는 군목의 비중이 연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곳곳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중요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고 얘기하는게 더 맞겠지? 특히나 첫째 아들이 상륙한 미군에 의해 발길질을 당하며 죽임 당하기 위해 끌려가기 직전의 상황에서 군목이 미군에게 목에 걸린 십자가를 내밀며 'Jesus'를 외치고, 그에 움찔하며 물러나는 반응을 보이는 미군의 연기는 참 억지스러웠달까 거북살스러웠달까. 내가 시대배경을 잘 몰라서 그런 탓일게지만 여튼 별로였어 나는.
참 주저리주저리 길게도 늘어놓았네, 그려.
오랫동안 이 느낌을 기억하고픈 욕심에 마음 속에 머릿 속에 담은 느낌과 말들을 다 풀어내다보니 이리도 길어져버렸네. :p
연극은 주로 아주 작은 소공연장에서 하는 것들만 봐왔었는데, 연극 스케일도 이렇게 클 수 있구나 하고 깨달은 날이었다.
지금 기분은 아주 므흣해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