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에 주루룩 나열된 영자들 그것도 가장 친하지 않은 법률 안내문들과 씨름하고 있으려니 숨은 막히고 머리는 굳어 가고 눈은 아파와서 도저히 안 되겠구나 싶어 여섯시 반쯤 전원을 끄고 바깥 나들이를 다녀 왔다. 공원에 가려 했는데 나서는 길에 양파 좀 사오라는 말에 그냥 세인즈버리로 발길을 돌려 두 시간 가까이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닌다. 마치 처음 와 본 것처럼. 장난감 코너와 dvd/cd 판매 코너에서 돈 한 푼 없이 꼭 살 것처럼 유심히 들여다 보다가 발길을 돌려 양파와 브로콜리 그리고 샐러리를 각각 하나씩 담아 계산을 하고 나오는 길에 라디오를 들었다.
bbc radio 4
우연찮게도 최근 영국의 바뀐 이민법에 관해서 토론 중이다.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싶었는데 다시 턱턱 막혀 온다. 국수주의적인 면모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화들. 영국민보다 뛰어날 때만이 당연히 취업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단다. 외국인 한 명 고용하는 것 조차 너무나도 어렵게 바뀌어버린 법. 돈 열심히 벌어다 막대한 세금을 꼬박꼬박 갖다 바치는 것과는 별도로 자국민 우선 고용 정책을 펴 주시는 나라. 국민이 원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 셈인데 나는 그와 반대의 흐름에 서서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정말 돌아가시겠다. 뭐, 우리나라가 스크린 쿼터제를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거나, FTA 하면 농가 다 망한다고 반대하는 거나 지금 영국이 이민법을 개혁해서 외국인 고용 제한을 하는 거나 결국 비슷한 건데, 나는 외국인이다 보니 그게 너무 힘겹다.
스폰서쉽만 나오면 다른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 질 줄 알았는데 웬걸. 일이 오히려 더 산더미처럼 늘어났어. tier-5(공연자) 비자 받는 절차는 뭐가 그리도 까다로워진건지 문서 읽고 세세한 절차 다 파악해서 한국에 넘겨야 하는데 쳐다 보고 싶지도 않고... tier-2 ICT(주재원) 비자 또한 마찬가지. 특히나 이미 마음이 떠나 버린 상태라.. 앞으로 나와 상관없는 법들에 대해 파악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더 손길이 안 가는 요인일 테다. 여튼 돌아버리기 직전. 머리에 달걀 하나 터뜨리면 금새 타버릴거야.
조금씩 식사량을 줄이고 간식을 줄이고 밀가루를 멀리하기 시작.
간식 대용으로 먹을 브로콜리와 당근과 샐러리를 손질해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입이 심심하면 조금씩 꺼내 먹으려구. 심리 상태가 안 좋아서인지 샐러리를 먹어서 인지 입이 몹시 쓰다. 싫어라.
으으... 도망가고 싶다.
이제 정말 이민국이랑 싸우는 거 지긋지긋한데.
오늘은 왠종일 이민국과의 전쟁.
뷁뷁뷁
조금은 진취적이고 조금은 밝은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오늘 우체국엘 가기 위해서(물론 결과적으로 가지 않았지만) 점심 무렵 샤워를 하던 중 문득 '결혼식'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별로 딱히 현실감있게 다가오는 녀석이 아닌 터라 그간 '나의 결혼식 장면'이란 것에 대해 단 한 번의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특이할 만한 일이었는데 아마도 어제 갑자기 쪽지를 보내 왔던 고등학교때 친구녀석의 미니홈피를 씻으러 가기 전에 방문했다가 그녀의 남편과 백일이 막 지난 그녀의 아들 사진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음... 나의 결혼식이라... 물론 옆에 누구를 세울지(?) 조차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마당에 이런걸 상상하는 건 정말 어이없는 일이지만 상상은 자유니까. 그러니까 너무 작지 않은 한낮의 햇볕이 따사로이 내리쬐는 걸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카페에 동그란 테이블을 여러개 놓아 두고 가족들이랑 정말 진심으로 축하해 줄 친구들만 여럿 초대하고 치렁치렁하지 않은 미니멀한 원피스 정도를 입고 따뜻한 눈을 한 사람과 평생의 동반자로 삼겠다는 약속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냥 본인/자식의 다음 결혼식을 위해서 또는 이미 당신께서 받은 축의금에 대한 답례로 형식적으로 와서 밥만 먹고 가는 그런 사람들과 그렇게 소중한 날을 보낼 필요는 없는 거잖아. 예식이 끝난 후 인사드리러 다니는 것도 꽤나 번거롭고 힘겨운 일이니까 말야.
비싼 웨딩 드레스에 예식장 대여비 그리고 기념 촬영 등등 비용이 잔뜩 드는 것들을 안 해서 왕창 아껴다가 여행이나 실컷 다니는 게 나에게는 행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호사스러운 여행도 필요 없고 그냥 적당히 깔끔하고 적당히 맛있는 식사를 주는 곳에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서 동떨어지지 않은 삶속으로의 여행. 좋지 않을까?
아, 글이 몹시도 길다.
이러면 지루한데 말야.
열 시가 되어간다
피부를 생각해서? 이만 자러 가야지
그리고 두 시에는 일어나서 일을 해야지
일단 내게 주어진 시간은 허허실실 여유를 부릴 만큼 많지 않으니까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