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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와 들뢰즈-가타리의 만남 - 깨달음의 몸과 기관들 없는 몸






                                                          장  시  기(동국대 영문과 교수)







  I. 근대와 탈근대의 시공간



  모든 만남은 우연적이다. 이 우연적인 만남이 필연적인 만남으로 승화되기 위해선 필연성을 드러내는 일련의 사건들이 필요하다. 필연성을 드러내지 않는 순수한 우연성이라거나, 우연성으로 드러나지 않는 순수한 필연성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어떠한 만남이 필연적이 되기 위해선 그 만남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필연성을 구성해야만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1300년 전 신라에 살았던 원효(元曉)와 20세기 후반 프랑스에 살았던 들뢰즈-가타리(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의 만남이 지니는 필연성은 탈근대의 시공간 속에서 가능하다. 즉, 근대 이전의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정치․경제․문화적 조건 속에서 서로 다른 삶을 영위하였기 때문에 상호의 만남은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이었고, 산업화와 자본주의화로 특징지어지는 근대는 서양의 정치․경제․문화를 전달하고 이식하는 과정 속에서 서구적 삶의 형식이 지리(공간)적으로 확산되는 것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상호의 만남은 지배적이거나 종속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탈근대의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지녀야 할 필연성은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이지 말아야만 할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대해 지배적이거나, 혹은 종속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지지 말아야만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원효와 들뢰즈-가타리의 만남은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으로 몇몇 개념들이나 이론의 유사성으로 가능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 형식이 학문적 국수주의나 사대주의의 형식을 지니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원효와 들뢰즈-가타리의 만남을 필연성으로 만들 하나의 사건으로서 탈근대의 시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동시대의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근대성(modernity)과 탈근대성(postmodernity)에 대한 이해가 우선적인 과제라고 하겠다.1)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근대적 자본주의의 세계와 인간의 삶을 해석하는 동시에 구성하고 있는 서구 근대 인문학이 탈근대의 인문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새로운 언어학과 정신분석학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새로운 언어학과 문학이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쏘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학은 언어가 곧장 그 지시대상인 사물을 지칭한다는 근대의 전통적인 언어관에 반대하여 “언어는 자의적인 동시에 관습적이다”2)라는 구조주의적 관점을 제시한다. 이러한 쏘쉬르의 언어관은 바흐찐(M. M. Bakhtin), 바르뜨(Roland Barthes), 그리고 야콥슨(Roman Jakobson)으로 이어지면서 ‘인간이 언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구성한다’라는 인식으로 나아감과 동시에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근대의 언어는 ‘서구․백인․남성 중심주의’로 이루어진 세계관과 문화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따라서 문학이론을 필두로 하는 탈근대의 비평이론은 근대의 서구 중심주의(혹은 제국주의적 국가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탈식민주의(혹은 복합 문화주의), 인간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생태주의, 그리고 남성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페미니즘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탈식민주의, 생태주의, 그리고 페미니즘이 탈근대를 지향하면서도 근대의 언저리에 남아있는 이유는 새로운 탈근대를 구성하는 공통의 언어를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들뢰즈는 플라톤의 이데아나 실재, 혹은 데카르트의 정신 중심의 언어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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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과학기술, 형이상학



- 베르그송과 바슐라르를 중심으로 이정우





대중의 일상성을 형성하는 인식 체계를 상식이라 한다. 여기에서 대중이란 인간들 중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어떤 측면을 말한다. 그것은 곧 일상성을 살아가는 한에서의 인간이다. 비(非)대중의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도 삶의 일정한 부분에서는 대중이며, 많은 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에서 대중이다. 대중적 일상성은 세계에 대한,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일정한 평균적인 인식 체계에 의해 밑받침된다. 즉 일상성은 상식에 의해 밑받침된다. 상식이라는 개념은 일정 측면에서 허구이다. 상식의 아래에는 무수한 불연속과 갈등, 집단 표상, 시대적 편견 등등이 요동치고 있다. 상식은 그런 차이들을 '상식'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신체 구조에 따른 지각 체계와 그 지각 체계에서 유래하는 일상언어로 구성된 흐릿한, 평균적인 무엇으로서 상식은 존재한다. 기술 문명에서 기인하는 지각 체계의 변화와 역사의 급변에 따른 일상 언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줄기차게 흘러가는 것은 상식이 내포하는 관성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상식의 대척점에서 형성되었다. 상식이 신체의 지각 구조와 일상 언어로 형성된다면, 형이상학은 비가시적 차원에 대한 사변과 비일상적 언어들의 구사를 통해 형성된다. 17세기 이래 발달한 과학기술은 상식의 세계(중간 차원)를 넘어 미시적-거시적 세계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상식과 다르며, 사물들의 내재적 법칙성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과도 다르다.







이로부터 형이상학의 위기가 도래했으며, 그 위기는 동시에 새로운 형이상학의 계기가 되었다. 베르그송은 19세기를 거치면서 본격화된 과학기술 문명의 본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형이상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냈다. 이 글은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이 상식 및 과학기술과 맺는 관계 및 그의 사유에 대한 바슐라르의 비판을 다룬다. 그러한 비교 검토를 통해 형이상학이 가야 할 길을 모색할 것이다.








지능의 한계와 형이상학






베르그송에게서 상식은 과학과 연속성을 형성하며, 과학은 기술과 연속성을 형성한다. 과학은 세련된 상식이며 기술은 과학의 현실화이다. 때문에 베르그송에게서 상식, 과학, 기술에 대한 분석은 이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구도 아래에서 다루어진다. 이것들 모두는 인간 지능의 산물인 것이다. 베르그송에게 지능이란 분석적 이성, 합리적 이성이다. 그렇다면 지능의 활동 양태는 어떤 것인가?






분석적 사고가 복합적 사물들을 분할한다는 것,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가장 단순한 것에까지 분할하며 그 분할된 것들을 다시 조합해 전체를 재구성한다는 것, 분할의 조건으로서 하나의 시작이 다른 하나의 끝과 겹치지 않는 'partes extra partes'의 성격을 띤 매거(枚擧)를 추구한다는 것 등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복합적이란 타자들이 섞여 있음을 뜻하며 분석이란 어떤 타자도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한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섞여 있던 것이 분할된다는 것은 그 섞임이 외적 섞임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완전히 섞여 있는 것들은 분할될 수 없기 때문이다(이 경우 엄밀히 말해 '들'을 쓸 수 없다). 분석을 허용하는 복합체는 곧 그 구성 성분들이 외적으로 섞여 있을 뿐인 복합체이다. 조합도 마찬가지이다. 부분들이 겹치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게 조합됨으로써 전체가 성립할 때, 분석과 조합이 가능하다. 조각 그림 오려-맞추기를 가능하게 하는 이런 성격은 정확히 공간에서 가장 선명하게 성립한다. 베르그송이 과학의 본성을 공간화에서 찾고, 특히 시간·운동의 공간화에 대한 비판을 형이상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능에 대한 베르그송의 포괄적인 분석을 상식, 과학, 기술의 경우로 분화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베르그송은 과학의 논리를 '고체의 논리'라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상식의 논리일 것이다. 상식의 논리는 고체를 모델로 한다. 왜인가? 인간에게 가장 명료하게 다가오는 분석은 공간적 분석이며(그래서 사람들은 지도를 그리고, 증권 시세를 나타내는 그래프를 그리고, 건축물의 도안을 그린다), 명료한 공간적 분석을 허용하는 것은 고체이기 때문이다. 반면 유체(액체, 기체)는 일정한 공간에 고정되지 않으며 때문에 공간적 분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액체와 기체를 다루는 것은 늘 고체의 도움을 받아서이다(그릇에 담긴 물). 상식은 사물들을 다루기를 원하며 그것들이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들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문화 세계 속의 인간들을 둘러싼 사물들은 일차적으로 도구들이며, 이것들이 도구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사물들의 사물-임을 생각하게 된다. 상식의 세계에서 사물들은 곧 '물건들'이다.






베르그송은 과학과 상식의 차이는 크기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미시 세계에 대한 과학의 분석은 사실상 거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미시 세계에 투영한 것이다. 천문학적 크기에서의 분석도 마찬가지이다. 근대 과학자들이 말하는 '입자'는 중간 차원(상식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사물들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물리학적 편의를 위해 일정한 가공을 가하긴 하지만(분할 불가능성, 탄성 등등) 원자는 필경 일상 세계에서의 공[球]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베르그송 이후의 과학을 생각할 경우 문제는 다르다. 수학이 가능한 공간을 사유하는 담론이라면, 현대 수학이 창출해내는 공간은 고대적인 공간(유클레이데스 공간)은 물론이고 근대적인 공간(사영 기하학, 리만 기하학 등의 공간)까지도 매우 단순한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수학적 공간의 소수만이 사물들의 공간에 적용된다 해도, 오늘날의 과학적 공간은 상식 세계에서의 경험을 투영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적합할 정도로 복잡하다. 과학과 상식의 연속성이라는 베르그송의 테제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베르그송의 테제가 유효하다면, 그것은 과학기술 -- 과학과 기술이 하나를 이루는 한에서 이렇게 쓸 수 있다(밀접하게 연계되지만 하나는 아님을 뜻할 경우 '과학-기술'로 또 서로 구분됨을 뜻할 경우에는 '과학/기술'로 쓸 수 있다) -- 이 본질적으로 사물의 조작을 지향한다는 점에 있다. 조작이 용이한 것은 고체이다. 달리 말해 무기물이다. 지능이 고체의 논리를 구사한다는 것은 곧 고체가 인간의 실용성 관심사에 부응함을 뜻한다. 따라서 지능 즉 분석적 이성은 '순수 이성'이 아니다. 지능은 진화의 산물이며 '호모 파베르'의 생존 무기이다. 분석적 이성이 순수 이성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대신 그것을 진화의 연장선상에 위치시킨 것은 베르그송 사유가 서구 철학사 전체에 맞세운 강력한 도전장이다. 그것은 탈근대 철학은 물론 탈서구 철학의 문턱을 형성하고 있다. 분석적 이성의 눈길은 순수한 눈길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사물에 대한 실용적 관심사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 이 선언이야말로 베르그송 사유의 혁명적인 선언이다.






이 때문에 합리주의자들이 순수 이성의 화신으로, 진리의 안내자로 생각했던 수학의 위상도 달리 생각된다. 수학, 특히 기하학은 칸트가 생각했던 '아프리오리한 종합 판단'이기 이전에 사물들의 조작을 위한 공간 조작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생존 무기이며, 땅을 측정하는 담론이기 이전에 인류의 긴 진화 과정을 통해 고체를 다루는 과정에서 형성된 담론이다. 지능은 무엇보다 '형식'에 밝은 인식 능력이다. 고체를 다루는 과정을 사유 공간에 옮겨놓고서 자유롭게 조작해 보는 능력, 이 능력이 문명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유클레이데스 기하학의 세계는 처음부터 순수 지성의 세계였던 것이 아니라 긴 진화 과정을 거쳐 인류가 도달한 독특한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분석적 이성은 이 독특한 인간의 문법을 가지고서 세계를 재단하는데 익숙해 있다. 베르그송은 그 전형적인 경우로서 제논의 역설에 주목한 것이며, 이 역설에 나타나는 분석적 이성의 논리(연속성을 마름질하는 분석, 부동의 조각들을 맞추어서 운동 전체를 재현하려는 시도 등)를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이런 생각이 결정적으로 대면해야 할 하나의 담론은 무한소 미분이다. 무한소 미분은 고대의 유클레이데스 기하학을 넘어 사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베르그송은 무한소 미분을 적극적으로 분석한다. 무한소 미분은 수학에 시간과 운동의 개념을 도입했다. 'dx'는 수가 아니라 개념이며, 이것은 곧 '극한으로의 이행'이라는 과정을 함축한다. 무한소 미분은 분석적 이성의 특징인, 사물의 불연속적 파악을 넘어 '어느 순간에나' 연속적 운동을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런 상황은 베르그송에게 있어 과학과 형이상학의 관계를 다시 한번 음미해야 할 필요성을 던져준다. 베르그송이 상식-과학-기술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이 담론들에 형이상학을 맞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의 역사 자체가 이런 관계에 끊임없이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과학과 형이상학의 관계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방식으로 수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담론들의 변화 과정을 따라가면서 계속 수정해야 할 내용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복잡해진다.






베르그송에서 과학과 형이상학은 이중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한편으로 과학과 형이상학의 경계선은 명확하다. 베르그송의 사유 전체가 이 이분법에 기반해 있다. 공간과 시간, 정지와 운동, 등질성과 다질성, 지능과 직관, ... 등등. 과학과 형이상학은 실재의 '반쪽'을 인식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과학은 발전하며 따라서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에 점차 가까이 간다. 즉 과학과 형이상학의 경계선은 계속 바뀌어간다. 이 때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은 과학의 극한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형상철학에서 무한소 미분으로, 그리고 양자역학 등으로 발전해 간 과학의 역사는 지속에 점차 가까워지는 흐름을 나타낸다. 때문에 형이상학은 과학의 극한적 외삽으로서, 과학의 극한으로서 존재한다. 과학과 형이상학의 거리는 점차 좁아진다(물론 과학이 법칙성을 추구하고, 기호를 사용하고, 공간화를 추구하는 한 그 거리가 소멸되지는 않는다)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의 경계선은 과학'사(史)'를 통해서 바뀌어간다. 베르그송은 첫 번째 관계를 주로 논했지만 이 두 번째 관계 역시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실증 과학은 형이상학의 직관에 점차 가까지 가지만 결코 만나지는 않는다고 결론내려야 할 것이다.






기술의 경우, 베르그송은 과학과 기술을 전적으로 연속적으로 파악한다. 상식, 기술, 과학이 모두 지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과학의 목적은 '예측하고 측정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과학을 기술과 거의 동일시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사유하는 것보다 사는 것이 먼저이다. 산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을 뜻하며, 행동한다는 것은 사물들을 조작한다는 것을 뜻한다. 신체적으로 열등한 인간은 도구 조작을 통해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모 파베르'는 흐르는 세계에서 잡아낼 수 있는 일정한 측면들에 주목하고 그 고체적 측면들을 조작한다. 생존한다는 것은 '대상들로부터 유용한 측면들만을 뽑아내는' 행동에 기반하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인간의 상식은 이렇게 형성되며, 기술은 그 세련된 형태이다. 과학은 기술의 연장선상에서 성립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물질에 관련해서 두드러진 성과를 낸다. 물질성이야말로 바로 그것이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이다. 설사 과학이 기술과는 별도의 목적으로 형성된 경우라 해도(17세기의 과학처럼), 결국 그것은 잠재적으로 기술을 전제하며 언젠가는 기술로 응용된다. 결국 상식, 기술, 과학은 모두 자연을 순수한 눈으로 보기보다 실용적 눈으로 본다. 베르그송은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과학이 매우 '주관적인'('자의적인'은 아니다) 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상식, 과학, 기술을 모두 묶어 지능의 이름 아래에서 비판하는 것은 이런 시각에 입각해 있다. 이 담론들은 모두 고체의 논리, 분석적 사유, 실용적 목적 등을 공통의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베르그송은 이런 사유 양식에 형이상학의 사유 양식을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미묘한 문제가 발생한다. 형이상학이 상식과 대립한다면 당연히 현실과도 대립하는가? 베르그송의 지속이 상식을 넘어 '실재'를 찾는 전형적인 '형이상학'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사유가 상식과 대립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r alit ' 개념에는 미묘한 이중성이 있다. 때로 그것은 상식의 세계를 뛰어넘은 실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어떤 경우 그것은 오히려 과학의 추상적인 법칙성에 포획되기 이전의 생생한 현실을 가리킨다. 베르그송이 어떨 때는 현상학과 대립하는 인물로 보이지만, 어떨 때는 매우 상통하는 인물로 보이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베르그송의 지속은 과학 이후의 실재인가, 과학 이전의 현실인가?






지속이란 분할될 수 없는, 고착화될 수 없는 흐름, 즉 연속적 운동 또는 운동하는 연속성이다. 베르그송의 'r alit '를 규정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속성이며, 이 속성이 감각적인가 초감각적인가는 이차적인 문제이다. 즉 우리가 베르그송의 지속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감각적인 것과 가지적인 것에 따라 현실과 실재를 나누는 기존의 사유 구도 그 자체를 버려야 한다. 지속은 감각 저편에 있을 수도 있고(예컨대 물 내부의 운동) 이편에 있을 수도 있다(표면에 나타나는 물의 흐름). 그러나 나타나 있는 지속이라 해서 그것이 상식과 합치하지는 않는다. 왜인가? 우리의 상식이 생각하는 '현실'은 이미 평균화된 세계이고(우리는 세밀하게는 모두 다른 사과를 그냥 '사과'라고 생각한다), 둔한 감각과 의식에 의해 고착화된 세계이며(우리의 둔한 감각과 의식은 매일 달라지는 강물의 모습을 포착하지 못한다), 일상언어를 통해서 이미 정돈된 세계이며(언어는 지속을 분할하고 고착화한다), 무엇보다도 특히 우리의 실용적인 관심사에 의해 채색된 세계이다(우리는 우리의 利害에 맞추어 사물을 재단한다). 그러나 현실을 섬세하게 보라. 그 때 상식과 현실은 같지 않음을 알게 되리라. 베르그송은 사물을 지속의 관점에서, 생생하게 볼 때 우리 모두는 예술가가 된다고 말한다.






베르그송이 과학, 기술, 상식을 묶어서 '지능'의 작업으로 파악하는 것은 앞에서 검토했듯이 일정한 무리함을 내포한다. 이런 점을 비판함으로써 과학을 옹호하고 형이상학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 인물은 바슐라르이다.








형이상학 비판과 새로운 과학정신






베르그송과 바슐라르가 부딪치는 첨예한 지점들 중 하나는 상식과 과학의 관계라는 문제이다. 과학적 인식이 상식이 세련화된 것, 중간 차원에서의 경험을 극대, 극미 차원에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베르그송의 생각과 달리, 바슐라르는 과학이 상식과 단절됨으로써만 과학으로서 성립한다고 본다('인식론적 단절'). 이런 생각은 이미지와 개념의 대립을 통해서 뒷받침된다.






바슐라르에게 인식이란 개념의 소관이지 이미지의 소관이 아니다. 이미지는 현상학과 시학의 대상이지 인식론의 대상이 아니다.(따라서 그의 시학에서는 역으로 이미지, 이미지작용=상상작용이 핵심에 놓인다) 이미지는 인간이 세계와 만나는 원초적인 장에서 성립한다. 따라서 그것은 아직 '합리화'되지 않은, 흐릿하고 불분명한 차원이다. 그러나 개념은 다르다. 개념은 지각의 언어가 아니라 사유의 언어인 것이다. 물론 상식도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은 다르다. 일상 언어에 대한 바슐라르의 생각은 베르그송과 일치한다. 일상 언어는 지각을 통해서 성립하며, 기본적으로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다. 그것은 실용적 목적을 띤다. 바슐라르는 일상 언어가 기본적으로 분류하는 기능을 한다고 보았으며, 지각을 통해서 얻은 성질들을 분류하는 자연발생적 계통학이라 보았다(漢字는 이런 사실을 특히 잘 보여준다). 반면 개념은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가 캘빈의 이미지들과 보어의 이미지들을 구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미지들은 '인식론적 장애물들'에 속한다.






바슐라르에 입각할 경우, 베르그송은 상식과 과학 사이의 간극을 보지 못했다. 과학은 상식을 미시/거시 세계로 투영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일상 세계에서처럼 한 고체의 공간적 동일성이 확보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는 미묘하다. 베르그송이 과학을 비판한 것은 그것이 상식의 이미지들을 아직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현대 과학이 상식으로부터 벗어나 인식론적 단절을 이룬 것은 베르그송의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예컨대 드 브로이는 '측정에 의해서건 관찰에 의해서건 만일 우리가 운동하는 대상을 위치짓고자 한다면, 우리는 단지 위치만을 얻을 뿐이며 운동 상태는 달아나버리게 된다'는 양자역학의 언어는 '공간에서는 오직 공간의 부분들만이 존재하며, 나아가 운동하는 대상을 생각하는 모든 지점에서 우리는 단지 위치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라는 베르그송의 언어로 번역된다. 즉 베르그송이 '과학은 ...하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근대 물리학을 말할 뿐이며, 그런 판단은 오히려 근대 과학으로부터 현대 과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긍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만년의 베르그송이 (상대성 이론에 대한 태도와는 정반대로) 양자역학과 (양자역학의 철학자인) 바슐라르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베르그송이 건강 때문에 양자역학을 적극 검토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드 브로이가 아쉬움을 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매우 미묘한 것이다. 베르그송은 양자역학 이전의 과학에 비판을 가했고 그 비판이 양자역학 형성에(특히 그의 강의를 들었고 또 그를 흠모했던 드 브로이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바슐라르는 양자역학 이후에 활동했으며, 양자역학이 고전 과학과 어떻게 다른지를 역설했다. 그렇다면 바슐라르의 베르그송 비판이 정말 뼈있는 비판인 것일까? 바슐라르가 그토록 강조하는 만큼 과연 두 사람이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도 우리는 논의의 축을 추상적인 논리 공간이 아니라 실제 역사 공간으로 돌려야 할 필요를 느낀다. 문제는 과학'사'이다.






베르그송이 과학사를 일관된 시각에서 읽는 것은 분명하다. 베르그송은 서구 학문 전체를 하나의 확고한 존재론적 시각을 가지고서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었던 몇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존재론적 시각이란 바로 시간이다. 때문에 베르그송은 서구의 과학과 철학의 역사를 시간 개념에 비추어 독해하며, 앞에서 말했듯이 과학과 형이상학을 뚜렷이 대비시키는 맥락과 과학이 지속형이상학에 계속 가까이 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맥락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리고 메이에르송은 베르그송의 시각에 입각해 서구 과학사를 좀더 실증적으로 파헤쳤다.






바슐라르가 베르그송을 겨냥해 던지는 비판의 한 맥락은 과학사에 대한 이런 등질적인 독해이다. 바슐라르는 일정한 형이상학의 입장을 과학사에 투영할 것이 아니라 과학사의 실제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과학사에 관한 한 바슐라르의 작업이 더 구체적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만일 과학사 연구를 (예컨대 미국의 대학들에서 활발하게 실행되고 있는 것과 같은) 철학과 거의 관계없는 개별 과학으로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철학적 관심사에서 추구한다면, 과학사의 '실제'에 충실한 것은 성실한 철학을 수행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철학의 핵심은 아니다.(물론 철학이 개별 과학들의 성과를 광범위하게 수렴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핵심은 그 과학사적 사실들의 철학적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서 메이에르송에 의해 제기된 '역사적 아프리오리' 개념을 상기해 보자. 메이에르송은 꽁트 이래의 전통에 따라 합리적 이성의 의미와 한계에 대한 인식론적 사유는 과학사에 뿌리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그는 칸트 식의 인식론, 즉 인간 이성의 구조를 고정시켜버리는 인식론을 비판하며, 과학사에 기반한 역사적 인식론을 강조했다. 그러나 만일 과학사에서 어떤 아프리오리한 측면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산더미 같은 과학사적 사실들만을 쌓아놓는다면, 그것은 적어도 철학적으로는 무의미하다. 우리는 과학사의 흐름 속에서 어떤 아프리오리한 측면들, 즉 과학적 탐구들에 앞서 미리 존재하며 그 탐구들을 이끌었던 인식의 가능 조건들, 공통항들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메이에르송 자신이 강조했던 '시간의 제거'가 그 예일 것이다.






그런데 '시간의 제거'는 단순히 하나의 '예'가 아니다. 하나의 예는 그것을 예로 하는 일반성의 한 경우이다. 그러나 그 일반성이 등질적이지 않고 다질적일 때, 예들은 대등한 경우들을 형성하지 않는다. 예들의 인식론적 지위는 같지 않다. 어떤 예는 핵심적이다. 우리는 '핵심적 예'라는 개념을 '그것을 논박할 경우 그것을 포함하는 일반성 자체가 무너져내리는 그런 예'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에르송의 '시간의 제거'는 핵심적 예이다. 왜냐하면 이 예는 과학의 '본질'에 관한 예이고, (메이에르송의 인식론이 기대고 있는) 베르그송 형이상학의 핵심 테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전 역학 체계에서의 가역성과 시간의 제거, 화학식에서의 동일성의 논리(예컨대 'NaOH + HCl = NaCl + H2O'의 경우) 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시간의 제거'가 역사적 아프리오리로 간주될 수 있으려면, 그것이 현대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사실 우리는 상대성 이론이나 구조주의 등에서 역시 이 요소가 등장함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모든 과학 이론이 시간의 제거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시간을 제거하는 과학이 나온 후에는 대개 시간을 중시하는 과학이 나오곤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 역학은 엔트로피 이론에 의해 논박 당하고, 상대성 이론은 양자역학, 카오스 이론 등에 의해 논박 당하고, 구조주의는 후기 구조주의에 의해 논박 당했다.






그럼에도 이 원리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모든(아니면 대부분의) 과학은 운동(더 정확히는 변화하는 양들 사이의 함수 관계)을 파악하고자 하며 그 점에서 과학이란 곧 시간의 과학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미분방정식의 독립변수가 늘 'dt'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볼 경우, 베르그송-메이에르송의 입장은 양면적이다. 과학이 곧 시간의 과학이며 따라서 과학사를 시간의 역사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분명 시간은 역사적 아프리오리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과학이 늘 '시간의 제거'를 실행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시간의 제거가 역사적 아프리오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 역사적 아프리오리는 시간의 제거와 복권이라는 이중 구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과학과 형이상학에 대한 베르그송의 양의적 입장을 다시 생각해 보자. 과학이 공간을, 형이상학이 시간을 탐구한다고 생각할 경우, 이 명제는 부분 진리로 머문다. 분명 과학에 있어 공간에 무게중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중요한 국면들에서 시간 또한 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바슐라르의 비판은 설득력을 가진다. 시간의 제거라는 역사적 아프리오리는 과학사에서 도래한 전혀 새로운 시대, 즉 양자역학의 시대를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방정식들이 '시간방정식'이라는 이름을 얻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양자역학에서 시간의 역할은 중시되며, 그 후의 카오스 이론에서는 결정적 의미를 되찾는다. 이 경우 베르그송의 과학관과 메이에르송의 역사적 아프리오리는 과학사를 통해서 논박된다.






그러나 과학사를 과학이 지속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보는 측면을 취할 경우 문제는 달라진다. 과학은 제논의 역리 이래 시간을 제거하는 것을 그 특성으로 했으나, 운동의 연속성을 포착한 무한소 미분, '모든 물리학 법칙들 중 가장 형이상학적인' 엔트로피 법칙, 그리고 시간을 우주의 근본 원리로서 인정한 양자역학, 카오스 이론을 거치면서 점차 베르그송적인 의미의 지속에 가까이 다가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과학과 형이상학은 연속선상에 놓이게 되며, 형이상학은 과학의 반대급부로서가 아니라 과학의 외삽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럴 경우 우리는 지속의 형이상학이 과학사를 일관된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는(유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빼어난 하나의 역사적 아프리오리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메이에르송의 이런 공헌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바슐라르적인 비판을 뚫고 나갈 수 있으려면 두 가지 사항을 극복해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바슐라르는 과학사에서의 다(多)와 불연속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제시한 인물이다. 바슐라르 이래 'la Science'를 논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되었다. 과학의 각 '구역들'은 자율성을 띨 뿐만 아니라 자체의 문제를 가진다. 공간적 복수성 못지 않게 시간적 복수성도 중요하다. 과학사의 불연속은 인식의 역사를 보는 눈에 있어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선구자의 신화'에 대한 비판은 과학사의 시간을 복수화시켰으며 또 이성의 일양적 전개라는 개념을 파기시켰다. 물론 바슐라르는 과학사의 불연속과 동시에 '포함' 개념에 의한 발전을 강조했다.(유클레이데에스 기하학은 곡률이 0일 때의 리만 기하학이고, 열역학은 입자들의 수가 무한히 많을 때의 통계역학이며, 뉴턴 역학은 운동체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릴 때의 상대성 이론이다) 바슐라르는 과학사에서의 개념적인 단절과 수학적인 포함을 동시에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 급진적인 생각은 분명 원리들에 있어서의 단절 문제이다.






시간형이상학을 통해서 과학사를 보는 입장이 과학의 국지성 때문에 파기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모든 과학은 기본적으로 운동을 다룬다. 과학이란 결국 운동의 법칙성을 잡아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만이 과학의 근본 원리라고는 할 수 없다 해도(다른 존재론적 원리들을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이 (존재와 더불어) 가장 근원적인 원리들 중 하나임은 틀림없다. 따라서 과학의 국지성을 강조한다 해도 과학에서 시간이 근본적인 원리로 작동함은 분명하다. 시간을 중시하든 제거하든, 시간에 대한 기본 태도가 한 과학의 성격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는 한에서 시간형이상학은 분명 과학의 근저를 사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과학사이다.






형이상학을 과학의 외삽으로 보는 한에서, 베르그송은 서구 담론사를 시간 망각으로부터 서서히 깨어나는 과정으로서 해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보는 한에서 과학사는 일관된 해석을 얻게 된다. 과학사의 세부적인 에피소드들, 우회로들, 우연들 등을 접어놓고 그 핵심적인 과정을 볼 경우, 결국 합리적 이성의 역사란 세계 속에서 이전의 개념틀(형상, 법칙, 구조 등)을 벗어나는 운동/변화를 잡아내고 그것을 더 복잡하고 더 역동적인 개념틀 속에서 해소시켜 온 역사이다. 흑체(黑體)라는 낯선 존재가 세계에 출현하면, 과학자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틀을 창출해낸다. 과학이란 낯섬, 차이를 동일성으로 용해시키는 작업이며, 그러나 그 동일성은 계속 진화하는 동일성이지 고착된 동일성은 아니다. 그런데 낯선 존재의 출현은 결국 새로운 운동의 출현이며, 새로운 운동의 출현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보면 과학의 역사란 결국 과학의 바깥에 존재하는 시간이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과학의 내부로 끌고 들어와 길들여온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과학에서의 다와 과학사에서의 불연속을 인정한다 해도, 시간형이상학에 의한 과학사 해석은 매우 매력적인 한 관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시간형이상학의 이러한 공헌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기술-과학의 연속성이라는 테제는 검토를 요한다. 베르그송이 'homo faber' 개념에 입각해서 상식, 기술, 과학을 연속선상에서 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바슐라르는 베르그송의 테제를 근본적인 수준에서 논박한다. 푸앵카레도 강조했듯이, 과학과 기술은 엄연히 다르다. 기술이 실용성을 본질로 한다면, 과학은 순수한 행위이며 실재의 발견을 그 본질로 한다. 베르그송은 현실적인 고체를 다루는 실용적 관심이 세계 인식에 투영된다고 했지만, 예컨대 현대 화학자들은 현실 세계와는 전혀 다른 조건들에 입각해 분자들에 적용되는 고체성 개념을 제시했다. 현실 세계에서의 기술 개념은 과학 수립에 있어 오히려 인식론적 장애물로 기능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비판은 상상적인 것과 관련해서도 제기된다.






그렇다고 바슐라르가 과학과 기술이 무관계하다고 보는 것은 전혀 아니다. 과학과 기술은 당연히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러나 바슐라르가 관심을 가지는 기술은 실용적 기술이 아니라 과학 탐구에서 요청되는 기술이다. 즉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기계들이기보다는 기구들인 것이다. 기구들은 곧 '물화된 이론들'이라는 뒤엠의 유명한 말처럼, 과학 탐구에서 기구들은 필수적이다. 합리주의는 '적용'되어야 하며 물질주의는 '합리화'되어야 한다는 바슐라르의 (과학적) 변증법의 입장에서 볼 때, 기구에는 이미 이론이 묻어 있고 이론은 이미 기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에게 기구들은 곧 이론과 실재 사이의 접면(接面)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바슐라르는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기술과 이론적인 과학 사이에는 날카로운 선을 그으면서, 동시에 과학적인 작업 자체 내에서의 기술의 의미는 전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분석은 베르그송적 기술 개념의 한계를 넘어 중요한 성찰을 제공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베르그송이 상식, 기술, 과학을 한덩어리로 묶어 '지능'으로서 다루고 그에 형이상학을 대비시킨다면, 바슐라르는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그 자리에 과학을 놓는다. 그리고 과학과 대조적인 또 하나의 행위로서 시적 행위(사원소의 현상학)를 놓는다. 이렇게 보면 결국 바슐라르는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을 과학과 예술로 대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베르그송이 형이상학에 부여하는 역할을 과학과 예술이 상보적으로 떠맡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존재/무, 시간, 그리고 직관의 문제이다.






베르그송에게 시간이란 결코 분할될 수 없는 연속적 운동이자, 그것을 통해 세계의 다질성이 나아가 세계에서의 새로운 창조(인간에 의한 창조나 사물들의 전이가 아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의 전적으로 새로운 도래)가 가능한 궁극적 존재이다. 지능은 이런 시간의 본성을 거슬러 운동을 분할하고 시간을 공간화한다. 시간의 이런 본성을 깨닫게 해 주는 인식 능력이 직관이다. 직관은 우리가 세계를 지속의 견지에서 볼 때, 공간보다 시간의 견지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할 때 성립한다. '고정된 것에서 운동하는 것으로 이행하는, 이미 존재하는 개념들에 의한 상징적 인식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운동하는 것 안에 자리잡는 그리고 사물들의 생명 자체를 받아들이는 직관적 인식은 그렇지 않다.' 즉 직관이란 시간-운동 바깥에 서서, 그것을 논리/사유 공간으로 환원시켜서, 공간화하고 양화해서, 분할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운동 그 안에 들어가서, 그 시간-운동과 하나가 되어 인식하는 것이다. 그 때에만 언어는 초극될 수 있고, 인식 주체와 세계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직관은 절대적 인식이다.






바슐라르 역시 직관에 높은 인식론적 위상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의 직관은 시간 속에 자리잡는 직관이 아니라 시간을 멈추는 직관이다. 그것은 수평적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그 흐름을 수직으로 끊으면서 솟아오르는 직관이다. 그것은 '순간의 직관'이다. 바슐라르와 베르그송의 직관은 전개념적 직관과 공히 대비된다. 즉 두 사람 모두에게서 직관은 개념적 이해의 수준으로 나아가기 전에 '직관적으로 이해해서 ... '라고 말할 때의 직관이 아니다. 바슐라르에게 그런 직관은 합리적 인식 이전의 직관이며, 상식의 수준에서 발생한다. 베르그송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직관은 동시에 개념적 인식 이상의 인식이다. 베르그송과 바슐라르에게 공히 직관은 일반적인 개념적 인식을 넘어서는 고차적 인식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베르그송에게서와 바슐라르에게서 다르다.






베르그송에게 직관은 지속의 직관이고 따라서 사물의 흐름과 주체의 흐름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지이다. 바슐라르에게 직관은 순간의 직관이며 흐름을 멈추게 하는, 즉 흐름 속에서 어떤 본질을 직관하는 것이다. 그 본질은 곧 수학적 본질이다. 바슐라르는 역동적 직관이라는 말을 쓰거니와, 이 말은 흐름/역동성의 직관을 뜻하지 않는다. 그 반대이다. 바슐라르적 직관의 가장 좋은 예는 아마 슈뢰딩거 방정식일 것이다. 물질의 흐름, 구름과도 같은 흐름 속에서 아름답기까지 한 방정식을 포착한 파동방정식이야말로 '순간의 직관'을 잘 예시해 준다. 바슐라르의 이원론이 하나로 합쳐지는 부분은 아마도 이 부분일 것이다. 시가 '순간의 형이상학'이라면, 양자역학의 세계와 시의 세계는 적어도 그 점에서 상통한다. 그러나 합리주의적 직관이 기하학적 직관, 형상적(形相的) 직관이라면, 시적 직관은 물질적 직관이다. 여기에서 아니무스와 아니마는 갈라진다.






베르그송은 상식, 기술과 과학을 하나로 묶고 그에 형이상학을, 그리고 함축적으로는 예술을 대비시켰다. 바슐라르에게서는 과학과 예술이 형이상학을 대치한다. 두 사람 모두 상식과 기술을 넘어선 순수한 세계 인식을 추구했지만, 과학에 대한 이해에서 갈라진다. 베르그송이 과학과 형이상학-예술을 대비시킨 그곳에서, 바슐라르는 형이상학을 대체한 과학과 예술을 대비시킨다.








탈코드적 사유로서의 형이상학







베르그송과 바슐라르의 입장을 염두에 두면서 문제들을 하나씩 정리해 보자. 우선 상식과 과학의 문제가 있다. 과학사를 거꾸로 거슬러올라갈수록 상식과 과학의 거리는 당연히 작아진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 문제는 '과학'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명목상의 문제이다. 과학이라는 말의 외연 자체가 사람에 따라 달리 이해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상식과 과학의 문제는 처음부터 매우 유동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로 올수록 그 거리가 점점 커져 온 것은 분명하며, 오늘날 과학의 세계는 상식의 세계와 거의 단절되어 있다. 그것은 아예 다른 '세계'이다. 나아가 현대 과학의 성격은 과거에 '형이상학적'이라고 불렸던 측면들을 상당 부분 포함한다(한 때 힘 개념조차도 형이상학적 개념이었다). 현대 과학은 고도의 사유의 세계인 것이다. 상식과 과학은 서로 다른 '세계'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바슐라르의 비판이 어느 정도 함축하듯이) 베르그송이 형이상학에 부여했던 역할들은 이미 과학에게로 이전되었는가? (양의성을 내포하는) 베르그송 사유의 한 측면에 입각할 경우, 일정 부분은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무한소미분은 고대 과학에 결여되어 있었던 연속성을, 즉 연속적 운동을 파악함으로써 지속에 가까이 갔다. 물론 현대 과학에서는 다시 불연속이 큰 역할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맥락은 과학사의 어떤 측면에 국한될 뿐 전체 국면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맥락은 다질성의 맥락이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세계는 계속 새로운 질들을 '무한한 오성'(스피노자)에 내보냈으며, 과학은 그런 질들을 포착할 수 있는 새로운 실험들과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수학들을 지치지 않고 개발해 왔다. 그럼에도 만일 세계가 '절대적인 질적 풍요로움'이라면 그 절대성은 직관을 통해서만 파악된다. 과학이 측정하고(측정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운동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기호화하는(마찬가지로 언어는 어떤 형태로든 실재를 고정시킨다) 작업인 한에서, 절대적인 질적 풍요로움은 영원히 과학의 저편에 남아 있는 잔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슐라르의 비판을 받아들이면서도 베르그송 형이상학의 의의를 저버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맥락은 바로 창조성의 맥락이다. (원칙적으로 그럴 수 없지만) 만일 과학이 궁극적으로 발전해 세계의 다질성을 완벽하게 기호화했다 해도, 시간이 멈추지 않는 한 세계에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질(質)이 도래하며 따라서 새로운 작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창조 개념과 전혀 다른 베르그송적 창조 개념은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기존의 과학·철학의 대전제를 무너뜨리는 혁명적인 가설로서, 모든 형태의 결정론을 논박하는 베르그송 사유의 최후의 귀착점이다. 따라서 베르그송 형이상학은 과학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하나의 관점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은 과학을 위한 형이상학은 아니다. 형이상학은 과학과 관련될 뿐 아니라 예술, 정치, 종교 등등과도 관련된다. 그럼에도 한 형이상학/존재론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것은 제반 과학을 넓게 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사유가 그런 사유로서 한 손에 꼽히는 사유라는 것은 물론이다.(베르그송과 더불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 형이상학의 거시적인 의미를 인정한다 해도, 과학사에서의 세부적인 사항들은 바슐라르가 강조한 다와 불연속을 충분히 밝히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있어 과학은 이론적 맥락에서와 실천적 맥락에서 서로 다른 모양새를 띠고 있다. 전통적으로 과학과 기술은 한덩어리를 이루지 않았다. 과학과 철학이 한덩어리를 이루고 예술과 기술이 한덩어리를 이루었다. 'techn '와 'philosophia'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과학-철학이 분리되었으며 동시에 기술-예술이 분리되었다. 그래서 20세기에 우리는 과학-기술 연합체와 철학-예술 연합체가 탄생한 것을 보았다. 이것은 (산업)자본주의의 탄생과 더불어 세계에 대한 인식이 타자에 대한 기술적 정복에 연계되면서 이루어졌다. 지식과 권력의 이런 관계는 'Knowledge is power'라는 베이컨의 말과 'Savoir pour pouvoir'라는 꽁트의 말에 압축되어 있다. 오늘날 과학은 우주의 비밀에 대한 '관조'가 아닌 일정한 기술 개발을 전제로 하는 '프로젝트'에 봉사하고 있다. 오늘날 과학의 기초는 프로젝트이다. 과학은기술을 전제하며, 기술은 기업을 전제한다. 나아가 (그 값이 수십억, 수백억에 이르는) 거대한 또는 정밀한 기계를 전제하지 않으면 연구할 수 없는 현대 과학의 속성은 과학을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와 연결시킨다. 이제 과학은 철학과 거의 관계없는 세속적 행위로 화한 것이다.






상식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 역시 이론적 맥락과 실제적 맥락에서 전혀 다른 관계를 맺는다. 이론적인 맥락에서, 상식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는 전혀 다른 두 세계를 형성한다. 일상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은 소통이 어려운 상이한 존재론에 기반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일상 언어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적 존재론에 기반해 있으나, 과학의 세계는 갈수록 이 세계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오늘날 미시 세계에서의 '존재들'은 실험 장치나 수학이 없이는 확인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다) 그러나 두 세계는 기술을 통해서 이어진다. 유체역학은 세탁기를 통해, 전자기학은 TV를 통해, 통계역학은 화장품을 통해 현실로 내려온다. 과학을 응용한 기술은 생활세계 자체를 급격히 개조해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컴퓨터로 점을 친다. 고도의 합리적 과학기술과 미개 시대의 점이 하나로 엮이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과학적 합리성과 자본주의-기술의 질주, 그리고 대중의 일상적 문화가 기묘하기 이를 데 없는 방식으로 얽혀 있는 세계이다. 순수한 과학도 없고, 소박한 일상도 없다. 과학도 일상도 결국 자본주의-기술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형이상학은 이런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서 존재한다. 과거에 형이상학은 현실로부터 멀어지려는 관조적 활동이거나(예컨대 플라톤의 철학) 국가의 통치이데올로기를 제공해 주는 거대 이론이었다(예컨대 성리학). 근대에 사람들은 형이상학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배척했다. 그러나 현실 자체가 근대인들의 꿈과는 반대로 철저하게 자본에 의해 식민화된 오늘날, '프로젝트'를 거부하는,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분업/분과화을 거부하는, '실용성', '생산성'을 거부하는, 물질적 조건(실험 기구 등)을 거부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는 그 자체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의 몸짓을 담고 있는 담론인 것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사람들의 행위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암암리에 세계란, 사물이란, 인간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인식(가장 넓은 의미)을 깔고 있다. 생명체가 무기물과 전혀 다른 존재라는 '존재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동물들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다.






형이상학이란 오늘날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하고 일반적인 사물 인식, 세계 인식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저항이다. 이론적으로 그것은 분과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기술의 시녀가 된 과학적 지식들을 통합해 (이제는 누구도 관심이 없는) 세계의 근원적이고 종합적인 인식을 추구하는 행위이며, 실천적으로는 모든 것이 (자본의 잣대에 따른) 실용성에 의해 평가되는 오늘날, 사판에 대한 관심이 이판에 대한 관심을 압도하는 오늘날, 세계와 사물을 순수한 눈으로 대하려는 저항의 몸짓인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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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obadinos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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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scrap / 2006. 9. 29. 11:52
사드 ( Donatien Alphonse Francois de Sade, 1740.6.2 ~ 1814.12.2 )

프랑스의 소설가.
별칭 :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프랑스 파리
주요저서 :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1791) 《알린과 발쿠르》(1795)

파리 출생. 통칭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라 불린 이색적인 작가로, 아버지는 백작이며 외교관이었다. 페트라르카의 애인이었던 라우라의 가계(家系)를 가진 사드가는 프로방스 지방의 명가로서 순수한 귀족이었다. 사드는 처음에 군인이 되어 7년전쟁에 참전하였으며, 후에 사법관의 딸과 결혼을 하였으나, 아르퀴에유의 거지여자 구타사건(1768)과 마르세유의 봉봉사건(1772) 등의 스캔들을 일으켜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생애의 1/3 이상을 옥중에서 보냈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정력적으로 집필 활동을 하였으며, 프랑스혁명으로 석방된 후로는 자작 연극을 상연하기도 하고, 정치운동에 열중하기도 하였으나, 공포정치 시대에 반혁명의 혐의를 받고 재차 투옥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체제하에서는 필화(筆禍)로 인하여 죽을 때까지 샤랑통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작품에는 두 자매의 운명을 대조적으로 묘사한 일종의 교양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1791) 《쥘리에트 이야기, 또는 악덕의 번영》(1797), 철학소설의 일종인 서간체 작품 《알린과 발쿠르》(1795), 신랄한 대화체의 작품 《규방철학(閨房哲學)》(1795) 등이 있고, 20세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발견된 성도착(性倒錯)의 총목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돔:120일》(1904)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도착성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여, 외설과 부도덕의 이유로 모든 검열을 받아야 했던 관계로 오랫동안 묵살되어 왔다. 따라서 그의 문학적 가치가 드러난 것은 19세기 말엽부터이며, 독일의 의학자와 20세기의 초현실주의 문학자와 실존주의자의 노력에 의하여 복권, 사회와 창조자에 대한 대담한 반항자로서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그는 성 본능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을 시도하여 인간의 자유와 악(惡)의 문제를 철저하게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사드의 문학은 현재와 같은 소외(疎外)의 시대에 다시 돌아보게 되는 필연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아폴리네르가 “이전에 존재하였던 가장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극찬하면서부터 더욱 그 사상적 ·문학적 가치가 재인식되었다. 사디즘(sadism:加虐愛慾)이란 말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시몬 드 보봐르는 <우린 꼭 사드를 화형 시켜야만 할까?(MUST WE BURN SADE)>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드는 이기적 욕구와 불의와 불행의 순간을 철저히 만끽했으며, 그것의 진실성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의 가장 큰 가치는 우리에게 혼란을 준다는 데 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의 본질적인 문제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철저히 재점검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노벨 상 수상자인 시인이자 수필가 옥타비오 파즈는 <사드 보다 더한 호색한(AN EROTIC BEYOND SADE)>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의 삶은 그의 작품 못지않게 특이했다. 그는 사상문제로 오랜 기간 수감생활을 했다. 지적인 측면에서 그는 독립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적에게도 관대했다. ‘새디즘’의 철학자로 알려진 그는 기실 그 자신이 희생양이었으며, 잔혹함의 이론가였지만 실상은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는 평생을 박해 속에 산 작가였다. 27년이나 감옥 생활을 했는데, 그 주된 원인은 인간의 욕정과 성적 집착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1772년 그는 성범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감옥을 탈출한다. 그 뒤 공포정치 시대가 도래하면서 정권에 반대하는 수천 명의 시민이 길로틴(단두대)에 희생됐을 때도 그는 또 한번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한다. 혁명의 성공으로, 자유의 몸이 된 사드는 음란 소설 발간 혐의로 또 다시 체포되어 나폴레옹 정부 밑에서 샤랑통의 정신병자 수용시설로 보내져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 10년을 보내게 된다.

자유주의자였던 ‘사드’는 왕 혹은 그로 상징되는 기존의 질서는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혁명주의자로 변신하지만, 그의 생활은 구걸하는 여인을 꾀어 알몸에 채찍질하고, 창녀들에게 최음제가 섞인 사탕을 먹여, 그 효과를 실험하는 등 비 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가 쓴 책들을 보면 강간, 근친상간, 변태적 성행위, 고문 , 간음, 폭력으로 가득 차있다.

그러면 정말 그는 사디스트였을까?
그가 일으킨 사건들을 보면 그랬을 것이라 생각도 드나, 그는 분명 단순한 사디스트는 아니었다. 그는 당시 팽배했던 인간의 도덕적 타락, 특히 귀족과 성직자의 성적 타락, 부도덕, 부패, 폭력 등 모든 악덕을 스스로 실험하고 관찰한 다음 그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쓴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사드’의 삶은 하나의 신화가 됐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을 달리고 있다. 사드 전기 작가 닐 섀퍼는 뉴욕 타임즈에 이렇게 기고한 바 있다. "사드는 문학의 밑바닥의 한계를 보여줬다. 그의 소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이다. 적을 아는 건 승리의 지름길인 법.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파악하는 것은 이 폭력적 시대에 우리의 정신건강을 위해 어쩌면 매우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작가 프랜신 뒤 플레시 그레이는 그녀의 저서 'AT HOME WITH THE MAQUIS DE SADE' 에서 역사가들이 사드에 대해 '서구 사상의 가장 명석한 영웅'으로 혹은 '모든 죄악과 음란성을 한데 섞어 놓은 정신 파탄자'로 극단의 엇갈린 평가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쩌면 사드는 그 두가지 면을 다 갖고 있는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더 연구 대상이 되는지도 모른다. 가장 잘 알려진 사드의 소설로는 '저스틴(Justine)', '줄리엣(Juliette)', '소돔에서의 120일(The 120 Days of Sodom)', '앨린과 발코(Alien and Valcour) 등은 그의 소설을 공포와 성적 도착을 뒤섞어 놓은 고백체적 형태의 '악당 문학(PICARESQUE)'이라고 규정짓는다. 그는 또한 '자기 억제는 인간 본성에 위배되는 것'임을 주장한 선구자로도 인정받고 있다.

사드는 프랑스 혁명 종반부에 'LES LIAISONS DANGEREUSES'의 저자인 꼴데로스 드 라클로등과 함께 픽푸스 감옥에 투옥 된 바 있다. 그곳에서 그는 마리 앙트와넷 을 비롯한 수천명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감방 창문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자신의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 곳에 갇혀서 눈 밑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행진을 지켜보는 것은 바스티유 감옥에서 자행된 어떤 폭력보다 수백 배 더 큰 상처를 내게 안겨주었다."

사드의 아내 르네 뻴라지(Renee Pelagie), 혹은 사드 후작 부인은 잘나가는 사교계 인사였으며 신앙심이 돈독한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의 문학적 재능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생의 대부분을 남편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데 헌신했다. 그녀는 사드가 샤렝턴에 있던 1810년에, 사드보다 4년 앞서서 세상을 떠났다.

61세의 나이에, 사드는 출옥한 지 얼마 안되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악명 높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의 신작 소설 '줄리엣'의 발간을 막기 위함이 체포의 목적이었다. 그는 재판을 받지 않았다. 대신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나폴레옹 정부는 그를 죽을 때 까지 샤렝턴 정신 병원에 감금시켰다.

샤렝턴은 당시 모범적인 정신병원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원래 수도원이었던 이곳은 신부 출신의 프랑소아 시모네 드 쿨미어가 수용시설로 개조한 곳. 샤렝턴의 원장인 쿨미어는 당시 새로 유행되던 '심리치료' 개념을 도입, 정신 질환자를 인간적이고 진보적인 방법으로 치료하는 데 주력했다. 19세기 초반의 일반적인 정신병자 치료법은 얼음물 목욕요법이나 출혈요법, 혹은 꼼짝 못하게 구속복을 입혀놓는 것등이 고작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정신병원에는 정신 질환자 외에도, 나환자, 저능아, 범죄자등, 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쿨미어 신부는 키가 4피트밖에 안되는 곱추였는데, 사드 후작과 친해져 그에게 샤렝턴의 극장 운영권을 맡겼다. 이 극장에서는 치료요법의 일환으로 정기적으로 연극이 상연되었는데, 출연은 환자들이 했고, 대본 집필은 사드가 맡았다고 한다. 물론 대본의 내용은 사드의 기존 소설들 보다는 훨씬 보수적이었다.

사드는 샤렝턴에서 방이 두개 딸린 스위트룸에 기거했다. 강이 내려다 보이는 이 '감방'은 각종 고급 가구와 미술품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250여권의 장서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호사를 위해, 사드의 가족은 샤렝턴 측에 매년 3천 리브르의 돈을 지불해야 했다.

앙토안 로이 꼴라 박사는 1806년 샤렝턴에 부임했다. 보수적인 의사이자 도덕주의 자였던 그는 나폴레옹 정부와 친분이 있었다. 사드가 샤렝턴에서 계속 글을 쓰고,동료 수감자들과 문학토론까지 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경찰을 불러들였고, 그 와중에 사드의 많은 작품들이 압수되었다. 이 작품들은 '입에 담기조차 힘든 음란성과 불경, 극악무도함의 극치'라는 판정을 받았다.

죽기 4년전인 1810년, 사드는 널찍한 자기 방에서 쫒겨났다. 나폴레옹 정부는 사드로 부터 연필과, 펜, 잉크등 글을 쓸 수 있는 모든 도구를 압수했다. 교도 행정관은 나폴레옹에게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사드는 그의 연설과 글로 범죄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계속 연금되어야 하며, 모든 의사소통의 수단도 박탈되어야 한다.

일설에 의하면 사드는 샤렝턴에 있을 때 막달렌 레클렉이라는 17세의 세탁부와 사랑에 빠졌었다 한다. 막달렌에 대해서 알려진 바라고는, 그녀가 사드의 방을 규칙적으로 방문, 그에게 글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는 것 외엔 별로 없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사드의 방에 간 것은 사드가 죽기 1주일 전이었는데, 그날 밤 사드는 일기에 막달렌이 자기 방에 2시간 동안 있다 갔으며, 그래서 무척 기뻤노라고 썼다.

사드 후작은 1814년 12월 3일, 샤렝턴에서 호흡 곤란증으로 사망했는데, 스캔들과 선정주의로 얼룩졌던 자신의 삶과는너무나 대조적인 유언을 남겼다. 수풀 속 아무 곳에나 이름 없이 묻어달라는 것. "내 무덤의 흔적이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려,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나라는 인간이 깨끗이 잊혀지길 바란다."는 게 그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바램과는 달리 2세기가 넘도록 학자들과 비평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은 ‘사드’라는 인물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그의 무덤가를 끊임없이 배회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유언과는 달리 샤렝턴의 묘지에 묻혔다.

‘사드’에 대한 의견들은 너무나 광범위하다. 몇몇 철학자들 니체, 크라프트 에빙, 앙겔라 카터, 카미류 팔리야 등은 ‘사드’를 간과된 천재, 악의 명예교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중엔 그의 작품 'JUSTINE'을 ‘조나단 스위프트’의 풍자소설에 견줄만한 고전으로 꼽기도 한다. 초현실주의 자들은 ‘사드’를 역사상 가장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치켜세운다. 반면, ‘루이 봉지’나 ‘로저 샤툭’과 같은 사람들은 ‘사드’가 부활되는 것 자체에 강한반발을 보인다. 그의 문장은 단조롭고 철학은 치졸하며 그가 세계 문학사에 남긴 것은 해독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평. 인류문화에 그가 공헌한 것을 굳이 찾자면 새디즘이란 단어를 남긴 것 밖엔 없다는 것이다. ‘샤툭’은 ‘사드’를 악의 전도사로 칭하며, 1965년 무어스 살인사건과 테드 번디의 연쇄살인사건이 ‘사드’의 영향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과연 어떤 평이 옳은 것인가? ‘사드’는 사악한 음란 작가인가, 아니면 중상모략에 빠진 천재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사드’의 소설은 현대 문화의 그 어떤 예술보다 극단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그의 문장은 한 순간에는 우습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역겹고, 일순 날카로운 사회 풍자가 엿보이다가도 어느덧 변태의 극단을 달리는 성적 환타지로 넘어간다. ‘사드’의 소설들을 연속해서 읽다 보면, 어느새 작가 자신의 프로필이 투영된다. ‘사드’의 작품은 그의 환경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갖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의 격동기를 겪은 몰락한 귀족. 그는 성인이 된 후 근 30년간을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살았다. 그의 소설은 어쩌면 끊임없이 솟아나는 분노의 샘물에서 퍼올린 물과도 같다. 그는 자신을 억압하는 위선자들을 질타하고, 자신의 광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글을 썼다. 또한 연금되어 있는 자신의 욕정을 환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서 도 글을 썼다. 그가 갇혀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환상의 농도도 짙어져 갔다.

'광기의 작가'라는 낭만적 개념에 딱 들어맞는 인물인 ‘사드’는 그 때문에 수 많은 예술가들에게 심리분석용 '로샤르' 시험지의 역할을 해왔다. ‘피터 와이즈’, ‘유키오 미시마’, 노벨상 수상 작가 ‘옥타비오 파즈’ 그리고 영화제작자 ‘피어 빠올로 파솔리니’는 모두 ‘사드’의 정전에 근거한 위작들을 만든 바 있다. ‘사드’는 그 문장의 극단성으로 인해, 예술의 본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예술의 참 기능은 무엇인가? 사회의 기존 이념을 공고화 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그에 도전하는 것인가? 혹은 문명을 만드는 제도, 정부, 교회를 지지하는 것인가, 반대로 그 모순을 폭로하는 것인가? 극단주의자들을 침묵시키면 어찌 될 것인가? 반대로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면 어찌 될 것인가?

사드 후작이 쓴 작품들은 1960년대까지도 프랑스 내에서 공식적 출판이 금지되어 있었다. 지금도 그의 책은 금서 목록에 단골로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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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사드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규방철학'을 빌려 본 적이 있었더랬다.
기절하는 줄 알았다.
뭐, 이런 책이 다 있나 싶었지.
그런데 말야, 다시 한 번 사드의 책을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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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OD&office_id=047&article_id=0000041654&section_id=001&menu_id=001


현실과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고전 해석의 재미

그럼 이쯤에서 과연 이 책들의 내용은 어떤지 살펴보면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먼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고미숙 지음)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들뢰즈의 사유를 바탕으로 고전을 다시 쓴 경우다. 유목, 탈주, 분열자 등 들뢰즈의 개념어로 <열하일기>를 소설처럼 쉽고 흥미롭게 재구성했다.


무엇보다 저자 고미숙만의 '유쾌한' 문체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유머와 패러독스'로 풀이하는 것이 눈에 먼저 띈다. 저자는 서문에서 "연암이 얼마나 '유머의 천재'인지 널리 알리고 싶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할 정도다.


그리고 저자는 <열하일기>를 통해 "조선 후기는 예기치 않은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지적 향연'의 장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며, 그곳에서 지금 이 시대를 넘어설 새로운 사유를 발견한다.


다음으로 <니체의 위험한 책>(고병권 지음)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평이하고 체계적으로 풀이한 책이다. 니체 사상의 전모를 접할 수 있으며, 그간 니체에 대해 잘못 알려진 오해를 바로잡기도 한다.


예컨대, 여성에 대한 니체의 이해하기 힘든 발언 즉 "여자는 봉사하기를 바라며 봉사에서 행복을 느낀다", "여자는 매력을 상실하는 것과 비례해서 증오하는 법을 배운다", "학구적인 성향을 지닌 여자에게는 성적 결함이 있는 게 보통이다"는 식의 '악담'(?)들에 대해 논한다.


과연 니체가 '꼴통 수준의 마초'인가? 서구 문화에 그토록 급진적인 비판을 가했던 니체, 플라톤부터 칸트, 헤겔까지 서구 철학의 관념론과 형이상학을 통렬하게 비판한 니체, 그가 정말 '꼴통 수준의 마초'였을까? 어쩌면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


또한 <니체의 위험한 책>은 저자의 명쾌하고 평이한 해설, 그리고 다양한 화보와 함께 니체를 읽는 재미가 있으며, 최근 몇 년 사이 급속하게 성장한 니체 철학에 대한 한국 학계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어 주목할 만한 책이다.


여기서 잠깐. 책에 '미친' 한 독자로서 '건방지게' 말해 본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분석한 맑스, 모든 우상에 대해 사정없이 망치를 내리친 '선천적 반골' 니체, 이 둘은 이 시대를 고민하는 진지한 젊은이라면 19세기 서구 고전 중에서 반드시 독파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정에 <니체의 위험한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계몽의 변증법>(권용선 지음)은 '지금 이곳의' 문제의식이 치열한 것이 눈에 띈다. 이성과 합리성을 지니고, '근대 계몽 프로젝트'를 통해 진화한 인간이 어떻게 파시즘과 같은 집단적인 광기에 휘둘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원저자의 문제의식도 그렇지만, 고전을 다시 쓴 권용선씨의 문제의식 또한 그에 못지않게 치열하다. 그는 인류를 야만 상태로 몰아가는 파시즘의 힘이 지금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고 본다.


즉 저자는 부시가 벌인 이라크 전쟁, 그리고 한국의 지역차별, 여성차별, 외국인차별에서 파시즘의 욕망과 징후를 발견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21세기판 파시즘인 이라크 침략전쟁에 분노한다. 이 책은 이런 광기가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21세기에 <계몽의 변증법>은 여전히 다시 읽어야 할 고전임을 확인케 한다.


이 책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뽑는다면, 그것은 근대 혹은 근대성을 비판하고 뛰어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계몽의 변증법>이 '근대 계몽 프로젝트'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라면, 니체의 사유와 연암의 유머는 근대적 이성의 파산을 선언하고 나아가 근대를 넘어설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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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첫 사랑인 남편, 천사 같은 딸들, 남루하지만 소중한 일상…
스물 셋,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찾아온 나 없는 내 인생…


17살, 너바나의 마지막 콘서트에서 만난 남편 첫 키스를 하고 첫 사랑을 나누고 첫 아이를 낳았다.
앤(사라 폴리), 23살.
6살, 4살 된 두 딸과 일년의 반 이상은 실직 상태인 남편과 함께
친정 엄마 마당 한구석에 있는 트레일러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낮에는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대학의 야간 청소부. 부유하지도 않은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지만, 하루하루 작은 행복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23살이 막 지난 어느 날 아침, 설거지를 하던 중 갑작스런 복통으로 쓰러진다.
셋째 아이를 기대했던 앤에게 날아든 청천벽력 같은 선고.
자궁암 말기. 남은 시간은 겨우 2달.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앤은 충격을 받지만 치료를 거부하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가족 누구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혼자서 삶을 정리하기로 한 것.
가장 먼저 앤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해야만 하는 10가지 리스트를 만든다.
나 없는 내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생각했던 것 보다 삶이란 건 나쁘지 않아…
이렇게 당신도 만나게 해 주고…


차츰 하고 싶은 일들,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주변을 정리해 나가는 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앤에게 어느 날,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가진 리(마크 러팔로)가 다가온다.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두 사람. 결국 리는 앤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녀에게 남겨진 시간은 많지 않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앤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데…

당신이 나에 대해서 모든걸 알았다면, 날 사랑하지 않았을 지도 몰라.
아냐.. 모든 걸 알았더라도 날 사랑했겠지…

THINGS TO DO BEFORE I DIE 죽기전에 하고 싶은 10 가지…
1. Tell my daughters I love them several times.
아이들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한다고 말해주기

2. Find Don a new wife who the girls like.
남편에게 어울릴 아이를 좋아하는 새 아내 찾아 주기

3. Record birthday messages for the girls for every year until they're 18.
아이들이 18살 될 때까지의 생일 축하 메시지 녹음하기

4. Go to Whalebay Beach together and have a big picnic.
다 같이 웰러비 해안으로 소풍가기

5. Smoke and drink as much as I want.
하고 싶은 만큼 담배피고 술마시기

6. Say what I'm thinking.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기

7. Make love with other men to see what it's like.
다른 남자와 사랑하는 것이 어떤지 알아보기

8. Make someone fall in love with me.
누군가 날 사랑하게 만들기

9. Go and see Dad in Jail.
감옥에 계신 아빠 면회 가기

10. Get false nails. And do something with my hair.
손톱 관리 받기, 머리 모양 바꿔보기


2006년 가을, 최고의 감성영화
가장 평범한 사람의 가장 특별한 이야기 - <나 없는 내 인생>


내용 인생을 살다 보면 삶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순간을 맞는 경우가 생긴다. 주인공 앤에게는 그 순간이 바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는 순간이다. 말기 암, 2달 남았다는 사형선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 대해 절망하고 살기 위해 몸부림 칠 때, 영화는 전혀 다른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자신의 죽음을 주변에 비밀로 하고 남은 삶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앤.
그 동안 하고 싶었던 일, 남은 사람을 위해 준비할 일, 그리고 자신을 위해 해야 할 일.

10가지 리스트를 써 내려가면서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단순하고 평범한 한 여인이 특별하게 삶을 정리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돌아 보게 된다. 바쁘게만 살아가는 일상을 최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에게 영화 <나 없는 내 인생>은 잠시 쉬어가는 쉼표가 되어줄 것이다.
덥고 치열한 여름과 박진감 넘치는 블록버스터의 잔치를 지나 선선한 바람과 함께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가 그리워 지는 가을, <나 없는 내 인생>은 2006년 가을, 최고의 선물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뻔한 눈물을 짜내는 시한부 인생은 이제 그만,
이제 관객은 새롭고 차별화 된 감동을 원한다.


내용 백혈병, 심장병, 말기 암… 한국 관객들은 유난히 시한부 인생과 관련된 영화를 많이 접한다. 그만큼 젊은 사람의 피해갈 수 없는 죽음, 끝이 보이는 삶이라는 소재는 드라마틱한 감동을 전한다. 그만큼 많이 활용되었던 시한부 인생이라는 소재는 어쩌면 관객들에게 식상하게 다가갈 수도 있다. 극적이고 자극적인 감동이나 눈물을 추구하는 한국 영화계에서는 “시한부 인생”은 어찌 보면 관객에게는 단골 손님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눈물샘을 마르게 할 정도의 감동을 원하는, 끈끈한 정과 현실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경향이 있는 한국 관객에게는 젊은 주인공의 시한부 인생은 눈물과 남겨진 미련, 그리고 미완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페인 제작진과 캐나다 배우들이 손잡은 이 영화 <나 없는 내 인생>은 삶과 죽음에 대한 조금은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두고 떠나는 마음에 어찌 나이, 성별, 국가의 차이가 있을까.
자신의 삶을 안타까워 하고,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더 살지 못함을 아쉬워 할 시간에, 주인공 앤은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혼자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것들, 또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을 차근차근 목록에 적어가며 앤은 짧지만 행복했던 삶을 반추한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많은 슬픔을 가슴속에서 혼자 삭여내는 앤을 보며 관객들은 저절로 내가 앤이라면 나는 어떤 목록을 만들어 갈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쉬움이 크고 미련이 남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가 삶의 내용과 모양을 결정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앤.
젊은 가슴, 투명한 영혼으로 준비하는 앤의 죽음은 그래서 그 잔잔함 보다 몇 배나 위력적인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최고의 배우, 최고의 연기
세계적인 시네 아티스트를 사로잡다!


미국, 캐나다 곳곳에서 실시된 20번 가까운 오디션은 완벽한 앤을 찾기 위한 발걸음의 시작이었다. 많은 배우들과의 길고 긴 오디션에도 앤은 좀처럼 감독에게 다가와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뉴욕에서 사라 폴리를 만나는 순간, 감독 이자벨 코이셋은 “앤이 문을 통해 걸어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발걸음, 눈빛, 손짓 그리고 목소리 까지… 사라 폴리는 너무 평범한 인물의 성격 때문에 감독이 미처 구체화 시키지 못하고 고민했던 작은 디테일 까지 앤의 모습을 완벽하게 스크린에 펼쳐 놓았다. 특히 너무나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녹아 든 배우들 덕분에 벵쿠버 외곽에서의 촬영 기간 동안, 일부 구경꾼들은 사라와 스콧이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모습을 보고 실제 가족으로 착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앤이 병원에서 의사에게 병에 대한 소식을 듣는 순간 – 충격에 휩싸였다 이내 진정하고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려고 결심하는 찰나의 순간-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사라 폴리의 열연은 스탭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그 이후 점점 내적으로는 강해지면서 육체적으로는 약해지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면서도 남편에 대한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이중적인 모습은 사라 폴리가 아니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사라의 이런 연기를 보고 감독은 “사라는 앤을 연기한 것이 아니었다. 앤 바로 그 자신이었다.”라고 표현했다. 제작자인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눈을 사로잡는 미인은 아니지만, 강하고 아름다우며 달콤한 모든 것을 한번에 표현해 내는 매력을 가진 배우’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알모도바르 최초의 “아메리칸 스토리”
스페인, 캐나다를 넘나드는 국제적인 프로젝트


세계적인 시네 아티스트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보수적인 사회제도에 반하는 도발적인 영화 문법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키카>,<하이힐>,<내 어머니의 모든 것>,<그녀에게>,<나쁜 교육>등의 일련의 영화에서 알모도바르는 양성애와 동성애에 대한 자유분방한 묘사, 부조리, 초현실적인 발상으로 기존 영화 문법과는 전혀 다른 내용과 형식으로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그의 영화는 스페인 영화 특유의 파격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나 없는 내 인생>은 알모도바르가 스페인적인 감성에서 벗어난 첫번째 시도라 할 만 하다.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던 낸시 킨케이드의 “침대를 뗏목 삼아”는 미국에서 널리 알려진 단편소설. 소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감독 이자벨 코이셋은 알모도바르에게 이 소설을 모티브로 영화를 만들 것을 제의했고 그 과정에서 소설의 배경이었던 마이애미 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캐나다 벵쿠버를 로케이션 장소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스페인 최고의 시네아티스트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그의 제작사 El Deseo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던 이 프로젝트는 스페인, 캐나다를 넘나드는 범국제적인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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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asquith - you

scrap / 2006. 9. 18. 01:56



http://blog.naver.com/ninepark91?Redirect=Log&logNo=17576075


위에 사이트에 가면 mary asquith의 you라는 노래가 있는데 말야.
좋아좋아-.
계속계속 듣고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리고 다른 노래들도 되게되게 많은데, 진짜 좋은 노래들이 많은 듯.
다른 노래 검색하다 나온 블로그인데, 대박이야~!

인터넷이란거 참 좋다, 그치?
이렇게 모르던 노래들도 많이 알 수 있고 또 들을 수 있고...
정말 무궁무진한 정보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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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ra vez

scrap / 2006. 9. 18. 01:37



outra vez( 한번 더/4'10") by nara leao



오랜만에 듣는 보사노바.
이런 밤에 듣기 참 좋은 것 같아-

재주소년 공연은 시간을 잘못 알고 간 탓에 30분이나 놓쳐 버리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맨 뒤에서 봤더니 룡자랑 경환군 얼굴은 보지도 못했어.
게스트로 나온 '이적'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해서 경환군은 살짝 심상한듯도 해 보이고~
그래도 좋더라- 탁 트인 '적' 아저씨의 목소린!

공연이 끝난 뒤 가챠샵가서 치즈스위트 고양이들을 결국엔 질렀다.
똑같은걸 세 개나 갖게 된 뒤 울상을 지었더니 불쌍해보였던지 아저씨께서 그냥 봉지에 든 걸
뽑아 주시더라~ 야호 >_< 홍대 가챠샵 아저씨 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앤드류스 에그 타르트에 들러서 고구마타르트랑 호두 타르트를 사고, 또 이마트엘 가서 호야한테 보낼 과자들을 이것저것 샀다. 흐음. 근데 언제 보낼런지..; 가족 사진도 보내 달랬다던데 있나 모르겄네 -_-

아아- 오늘도 1교시.
그만 자야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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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심하게 귀여우시잖아~~~
꺄아아악-
5개 다 꼭 모으고 말테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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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징후

scrap / 2006. 9. 15. 22:29


사춘기 징후

2006. 9.1 - 11.05

로댕갤러리

(http://www.rodingallery.org/)


사춘기 징후>는 1990년대 이후 한국현대미술의 전개양상을 조망해보는 전시로, 사적인 감수성의 영역과 공적인 사회문화의 영역이 교묘하게 결합돼 있는 오늘날 미술의 한 단면을 드러내 보인다. 우리 시대의 상당수 작가들이 소년기나 학창시절, 또는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주변부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흥미로운 작업을 생산하는 점에 주목한 이 전시는, 제도의 언저리를 맴도는 동시대 미술가들의 심리적 갈등이 '사춘기'라는 인생의 과도기에서 겪게 되는 내면적 모순과 놀랄 만한 유사성을 지닌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러나 이들의 표면적 감상주의의 이면에는 묵직한 비판의 의지가 내재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 한국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겪은 급격한 변화는 가치관의 혼돈을 야기하고, 그로부터 초래된 보이지 않는 곳의 균열과 결핍의 현상이 현대 미술가들에게는 비판적 사유의 출발점이자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중력과 속도가 충돌하고 자부심과 열등감이 공존하는 한국사회야말로 아직 미성숙하거나 또는 성숙의 단계없이 조로해버려 사춘기적 징후를 겪을 수 밖에 없는 사회인 것이다.


관습과 권력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일상에 깃든 모순을 들춰내는 일까지, 집단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개인의 탈정체성 추적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집요한 관찰자이자 비판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온 작가들은 이번 전시에서 교복 입은 청소년들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 위계질서의 생산기관으로 지목되는 학교생활을 재조명하거나 주류문화에의 편입에 실패하고 좌절한 하위문화를 되돌아 봄으로써 개인적 경험과 기억에서 유추해낸 사춘기적 태도를 드러낸다. 또한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의 특이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대신 이를 유희화하고 상상의 영역을 확보하는 행위를 통해 기성문화와의 차별화를 추구한다.


회화, 조각, 설치, 사진, 영상, 만화 등 여러 장르와 다양한 작가층을 포괄하는 이번 전시에는 김홍석, 박진영, 배영환, 새침한 와이피, 서도호, 양만기, 오형근, 임민욱, 장지아, 최민화, 플라잉시티, 현태준 등 12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한국현대미술가들이 걷고 있는 경계 위의 삶을 인생의 과도기와 견주어 보는 이번 전시는 '비판하는 이성의 눈'을 '불안한 사적 감수성의 세계'와 교차시켜 미술의 다양한 읽기를 시도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출처 : 로댕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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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클럽에스프레소

scrap / 2006. 9. 15. 00:39
[93호] [place]부암동 클럽에스프레소2005.09.23 04:27
http://paper.cyworld.nate.com/chmade/824580


부암동의 클럽에스프레소

부암동... 사실 처음 들어본 동네이름이다.

하지만 알고보면 그 동네에 있는 '환기미술관'도 갔었고, 삼순이의 촬영지이기도 한 곳이었다.

모르고 갔다면 분명 그냥 지나쳤으리라.

그냥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산장의 카페같은 낡은 냄새가 나는 곳이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곳의 커피  

20대부터 커피에 푹 빠져있던 이 카페의 주인은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바리스타라고 한다.

맛있는 커피를 찾아 안돌아 다닌 곳이 없고, 커피를 배우기 위해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고.

모든 커피가 5천원 이하인걸 보면 주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핸드드립이란 이름으로 1만원을 웃도는 씁쓸한 커피 한잔과는 다른 느낌.

게다가 리필은 새잔에 가득.



생두를 직접 볶아 만든 커피

커피콩이 담긴 포대와 로스터.

수입해 온 생두를 직접 볶아 하루가 지난 후 갈아서 만든다.

콜롬비아·코스타리카·과테말라·브라질·예멘·이디오피아·인도네시아 등 나라명이 곧 이 집의 커피 메뉴.


갈아서 팔기도 하는데 예멘이 가장 인기가 좋다고.

늦은 밤이라 남은 예멘이 없어서 코스타리카 100g을 사왔다.

오는 내내 차안에서 커피향을 맡을 수 있었다.



달지않은 쿠키와 함께 나온 카푸치노

이 곳 카푸치노는 설탕을 넣지 않아도 거품에서 커피와 밀크의 맛이 제대로 느껴진다는

동행인의 소개에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카푸치노도 좋지만 리필로 나온 오늘의 커피가 정말 Good.

매일 매일 다른 커피로 '오늘의 커피'를 낸다고.

무얼 고를지 고민스러울땐 운에 맡겨보는것도 좋을듯.

직접 구운 쿠키도 달지 않아 좋다. (역시 쿠키도 사갈 수 있다)





하나 하나 직접 만든 카페안 가구들

이 카페의 테이블과, 의자등의 모든 가구는 주인이 직접 대패질을 하고

뚝딱뚝딱 2년에 걸쳐 만든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

정말 얼마나 애착이 가는 카페일까?

목공예 제품도 판매하고, 각종 커피관련 제품과, 홍차등도 진열되어 있다.

문을 닫을 시간까지 이 곳에 있었다.

클로징 타임이라고 와서 얘기하긴 했지만 서둘러 나가달라는 눈치를 주지도 않았고

커피를 살 수 있겠냐고 했더니 기꺼이 갈아주던.

나오면서도 참 따뜻한 카페였다.


클럽에스프레소 tel: 764-8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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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훌륭한 곳을 어찌 아직까지 몰랐단 말인가!!!
착한 가격에 뛰어난 커피 맛이라니~
꼭 가봐야지!
같이 가실 분? ^-^

Posted by nobadinos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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